아름다운 일과 먹고사는 일..감정노동·공짜노동 '살아내기'

한겨레 2022. 10. 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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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박수정의 오늘, 여성노동자][한겨레S] 박수정의 오늘, 여성노동자
프리랜서 편집디자이너 영은씨
작가와 공동작업자인 편집자, 편집디자이너가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협업을 하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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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착취당하는 기분은 외주 편집 일이 더 심했어요.”

두어달 전, 후배와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4년 전에 내가 잘 읽은 책의 편집디자인을 후배가 했다는 걸 알았다. 당시 나는 연결된 단톡방마다 책 사진을 올려 이건 올해의 책이니 꼭들 사서 보자고 부추겼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듯 소개했다. 그랬던 책을 ‘네가 만들었다니!’ 뒤늦게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책을 꺼냈다. 서지 정보에 디자이너 이름이 담겼다.

그렇다면 아이코, 첨부터 이름을 봐놓고는 까맣게 잊었구나. ‘역시 잘하네, 말해줘야지!’ 혼잣말하던 내가 퍼뜩 떠오른다. 다시 훑어도 보통 공들인 게 아니다. 그때도 다채로운 편집에 책 속의, 책 속의, 책을 읽는 느낌이 새로웠는데. 글쓴이가 오래 홀로 애쓴 만큼, 편집디자이너인 후배는 그 흔적을 시각적으로 고스란히 되살려내려고 애쓴 게 분명하다. 외주 편집에 서로 얼굴 볼 일 없어도 디자이너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독자인 내가 받은 감동은 작가와 공동작업자인 편집자, 편집디자이너가 함께 일군 것.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여러 공정에서 품을 보탠 사람은 물론 더 많다. 그런 후배가 22년 동안 해온 일을 관두고 공장에 갔다. 편집 쪽 일은 손에서 놓았다며, 지금은 떠올리기도 싫다고 했다. 더는 묻지 않았지만 ‘착취당하는’이라는 문자를 대체할 말이 없었을 듯했다.

‘감정 쓰레기통’ 역할이라니

“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쌓이고 쌓여서. 후배분이 이해돼요. 이 일은 정신적인,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좀 해야 해요.”

영은(가명)씨는 15년차 편집디자이너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 5년. 그이 작업은 단행본을 비롯한 책자, 리플릿, 포스터 등 종이 인쇄물로 나온다. 회사에서는 열몇권 전질을 책임 맡아 발간했다. 여러 사람이 관계한 크고 무거운 기획에도 주춤하지 않고 디자인해 나가던 사람이다. 강행군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회사를 나왔다. 돈은 줄었지만, 몸 상하지 않고 일하려 한다. 퇴사하고는, 요가로 숨쉬기부터 다시 배우며 자신을 보살폈다. 그런데 ‘감정 쓰레기통 역할’이라니.

“의뢰인이 원고를 가져와요. 그럼 본인이 원하는 방향을 얘기해줘야 하잖아요? 아주 구체적이진 않아도 큰 틀이 있을 텐데 거의 얘길 못 해요. ‘좀 예쁘게 만들어주세요’ 정도죠. 그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시안을 보통 3개 만들어 줘요. 거기서 하나를 골라 발전시켜야 하는데 다 버리고 완전히 뒤집으면 스트레스 받죠. 하도급 일도 그래요. 의뢰인과 최종 의뢰인이 다르잖아요. 담당자와 소통해서 일을 진행했는데 정작 이 사람은 결정권이 없어서 기껏 진행한 작업을 번복하는 일이 생겨요. 통로가 단일화되지 않은 일은 굉장히 힘들어요.”

어떤 의뢰인은 원고나 문안을 제대로 교정·교열하지 않은 채 맡긴다. ‘아, 그냥 해줘요’라며 디자인을 먼저 만들어달라고 막무가내다. ‘금방 고치잖아요’라며 뒤죽박죽 수정을 요구해 일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이러다 의뢰인이 확인을 안 해 놓친 실수가 인쇄되면 애먼 디자이너에게 책임을 돌린다.

“일에는 다 공정이 있는데 이걸 무시해요. 최소한 예의와 상식을 지켰으면 하죠. 예의 없음은 일을 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작업자에게는 작업자의 공정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야죠. 작업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로 다 해보고, 이게 최선이겠다 해서 결정을 내려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안 되는 것까지도 다 확인하고 판단해 결정하니까요. 의뢰인이 이렇게 해달라는데 작업자가 ‘이것보다는 이게 낫겠습니다’ 했을 때 작업자를 믿는다면 일이 잘 풀리죠. 작업자의 말을 귀담아들어주면 작업자는 뭐라도 더 해주고 싶죠. 그게 시너지죠.”

100% 일인데도 모른다

영은씨는 작업비와 기한을 잡을 때 직장인 임금을 참고한다. 예를 들어 250만원이 작업비라면 일의 양을 가늠해보고 한달 기한으로 잡는다. 하지만 종종 의뢰인 사정으로 기한이 연장되는데 그에 따른 돈은 받지 못한다. 공짜 노동을 하는 셈이다.

“의뢰인은 공짜 노동이라고 인지하지 못해요. 일이 끝나지 않은 거니까요. 인쇄물 납품까지 다 해야 돈을 받으니까요. 의뢰인이 중간에 잠수 타거나 피드백을 안 주면 일이 늘어지는 거죠. 워낙 디자인 일은 24시간 연장이 돼요. 나도 모르게 계속 생각하죠. 어떻게 하지? 무슨 색을 써야 하지? 그게 떠나질 않으니까요. 생각을 끊을 수가 없어요, 일이 끝나지 않으면. 그러니 나는 정한 날에 일 끝내고 홀가분해지고 싶죠. 딴 일도 해야 하는데 늦춰지면, 나는 이걸 계속 기억해내려고 에너지를 써야 해요. 디자인은 흐름이 있어요. 일을 멈췄다 다시 시작하려면 작업 과정을 다 기억해내야 해요. 또 작업하던 때의 그 긴장으로 나를 끌어올리려면 시간을 써야 하죠. 그러니까 일을 계속 진행해서 기한이 되면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죠. 회사에서라면 의뢰인 상관없이 월급을 받지만, 프리랜서는 아니잖아요. 생계를 계획하고 예정한 돈이 있는 건데요.”

공짜 노동은 더 있다. “100프로(%) 일이고 노동이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일들. 사전 상담을 비롯해 인쇄소를 연결해주고, 적당한 종이를 골라주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등 ‘핸들링’ 비용이다. 회사에서는 견적에 포함해 계산한다는데, 프리랜서인 영은씨는 이를 달라고 하기가 어렵다. 디자인과 핸들링 비용을 나눠 요구하자니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나 싶고, 디자인비에 포함해 계산하면 무슨 디자인비가 이리 비싸냐 할 테니 “굳이 언성 높여서까지 받아야 하나 싶어” 저절로 거둔다.

“편집디자인은 의뢰인과 생각이 맞아 일이 쭉쭉 진행되면 진짜 재밌어요. 더 잘해주고 싶죠. 그리고 바로바로 입금되면 훨씬 더 좋겠죠? 나는 ‘이 일은 너무 아름다운 일이야, 가치가 있어’라기보다는 ‘이 일로 내가 늙을 때까지 먹고살 수 있나?’ 좀 현실적으로 다가가요. 디자인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이걸 하면 얼마 받아야 해’를 먼저 생각하죠. 그래서 이 일이 나한테 빚지지 않고 살게 만들까, 이런 고민이 더 많아요. 일하며 계속 살아내는 거죠.”

르포 작가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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