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 에르메스 고야드..한번 입은 옷 다시 안 입는 그녀 때문에 생겼다 [생생유통]
19세기 중반 佛파리서 태동
나폴레옹 3세 부인 외제니 황후
한번 입은 옷 다시 안 입는 사치
세계적 패션 아이콘으로 떠올라
루이비통 황후 가방으로 사업 궤도
나폴레옹 3세의 상업지구 조성
파리에 백화점 잇따라 생겨나며
세계 패션 중심지로 발돋움
"패션 르네상스의 선구자"
유수의 도시 중 왜 하필 파리였을까요. 답은 '후원자'에 있습니다. 르네상스의 '키다리 아저씨'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이었듯, 프랑스 패션산업에서도 든든한 후원자이자 구매자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이었던 외제니 황후가 그 주인공입니다.
21세기 패션은 팝스타가 주도합니다. 그들의 옷, 가방, 패션 아이템은 선망의 대상입니다.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화려한 의상과 생활양식으로 무장한 프랑스 황실 인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중 외제니 황후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수려한 외모부터, 패션 스타일까지 남다른 '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블랙핑크의 제니가 있다면, 200년 전 프랑스 파리에는 외제니가 있었던 셈입니다.
외제니는 과시적 인물이었습니다. 아침, 오후, 저녁마다 옷을 갈아입었고, 한 번 입은 옷은 다시는 입지 않았죠. 그녀의 롤모델이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점은 사치와 향락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제2제정이 세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기에, 외제니의 패션 아이템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미국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패션 잡지에는 'Empress Blue’(황후의 파랑)라는 색상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유럽과 미국 전역의 부티크에 전시됩니다. 사교계의 고위 인사들은 외제니를 따라 하기 바빴습니다. 영국의 풍자 잡지 펀치(Punch)는 그녀를 두고 "패션의 여왕"이라고 비꼬았을 정도입니다.
황후의 화려한 의상과 이를 따라 하기 바쁜 귀족들. 이들이 현대 패션산업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외제니 황후가 지방을 순시할 때, 그만큼 많은 옷들이 따라가야 했습니다. 이를 잘 수행하는 시중의 역할도 필수적이었죠. 당시 파리에는 가방을 잘 만들면서 효율적으로 짐을 싸는 걸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루이 비통입니다. 외제니는 루이 비통을 자신의 전담 짐꾼으로 앉힙니다. 추후에는 외제니 황후의 후원으로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개업합니다. 루이 비통의 정식 회사명 Louis Vuitton Malletier에 트렁크 만드는 사람(말레티에)가 들어간 이유입니다. 패션 아이콘 외제니의 트렁크를 만드는 회사의 제품을 사기 위해 귀족들이 줄을 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루이 비통이라는 전설의 시작이었죠.
옷으로 살고 옷으로 죽는 외제니에게 전담 재봉사도 기본이었습니다. 1869년 한 남성을 공식 드레스 메이커로 임명하기도 하는데요, 바로 영국 출신 찰스 프레더릭 워스였습니다. 외제니 황후의 옷을 전담으로 만들기도 한 그는 후에 귀족 계층 전용 상점 '하우스 오브 워스'를 열게 됩니다. 황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 역시 큰 성공을 거두게 됐는데요. 이 이후부터 상류층 전용 의류 상점인 '오트 쿠튀르'의 시대가 본격 개막하게 됩니다. 오트는 프랑스어로 상류층을, 쿠튀르는 재봉사를 의미합니다. 상류층을 위한 브랜드들을 통칭하는 의미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세계적인 패션 행사인 파리패션위크에는 지금도 고급 맞춤복 중심의 오트 쿠튀르와 대중을 겨냥한 기성복 프레타포르테 쇼가 시기를 달리해 열립니다.
외제니 황후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다만 그만의 힘으로 패션이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사업이 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인프라스트럭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외제니의 남편, 나폴레옹 3세입니다.
외제니 황후는 1920년 스페인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의 나이 94세였습니다. 천수를 누린 삶이었지만, 남편인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강제 퇴위당했고, 그의 외아들 나폴레옹 4세도 영국·줄루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합니다. 외제니는 세계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었으나, 쉽게 그 빛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남서부 여름 휴양지 비아리츠. 이곳에 자리한 뒤 팔레라는 이름의 호텔에는 유럽 전역에서 관광객이 몰립니다. 나폴레옹 3세가 고향 스페인을 그리워하는 외제니 황후를 위해 지어준 별장이기 때문입니다. 외제니가 떠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세계는 그를 기억합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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