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쉽] 한국 불평등 확대가 중국 때문?
뉴스쉽 「중국경제와 헤어질 결심? 중국, 어떻게 달라졌길래 (2022.9.3)」편을 쓴 이후 여러 가지 피드백을 받았는데, 눈에 띄는 내용이 있었다. 한국경제 내에서의 불평등 확대를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 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한국경제가 중국 덕에 급성장한 것도 사실이고 중국이 한국에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 내의 경제적 불평등 확대를 중국의 영향으로 설명한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솔깃했다.
한국의 불평등 문제를 중국과의 관계에서 풀어낸 책은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의 『좋은 불평등』. 최병천은 진보진영의 '정책활동가'이다. 정치 경제 담론 시장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으로 지난 대선에 잠시 몸담긴 했지만, 강경파의 도그마에 휘둘리지 않고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인 분석과 중도층도 공감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해서 범 보수 진영에서도 그의 글과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먼저 책을 읽고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언제부터, 왜 확대되었고, 어떤 경우에 축소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까?
다음 문장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등 신흥국을 털어먹으려는 국제투기자본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고, (선량한 피해자인) 한국경제에 가해진 IMF의 가혹한 구조조정 패키지로 인해 한국은 우량자산과 기업을 헐값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등 고용의 문제도 이를 기점으로 악화됐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불평등이 확대됐다."
경제적 불평등의 3대 변곡점과 중국의 관계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진다. 노동자들, 특히 수출 제조업 기업의 노동자들이 노조로 조직화된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묶여있던 제조업 임금이 급격히 상승한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로 중국이 개혁개방에 본격 시동을 건다. 이 해에 한중 수교도 이뤄진다. 중국은 적극적인 투자유치에 나선다. 그러자, 선진국 대비 낮은 임금을 경쟁력으로 삼던 한국 기업들이 대거 중국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한다. 이는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추이 그래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때 한국을 떠난 공장들은 세계적인 산업체계에선 저임금일지 모르나 당시 국내에선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였다. 안 그랬으면 왜 많은 청년들이 시골을 떠나 공단으로 몰려들었겠나.
공장이 대거 중국으로 떠나면서 한국사회에선 양질의 중간층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이것이 1994년을 기점으로 한 불평등 확대의 실체다. (공장 일이 뭐가 중간층 일자리냐고 하실 분이 있을 텐데, 이에 대한 설명은 뒤에 나온다. 대한민국의 하층민은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못 받는 공장근로자가 아니라 그런 일자리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최병천의 지적이다.)
최병천에 따르면, 이런 변화는 한반도 바깥 세계의 더 큰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해 공산주의권이 무너지면서 미소 냉전이 끝났다. 1990년 전세계 노동력 규모는 14.6억 명 수준이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시장경제에 의한 세계화가 불붙으면서 구 공산권 또는 비동맹 진영의 인구 대국들(중국 인도 등)이 대거 세계시장에 노동력 공급자로 등장한다. 전 세계 노동력 규모는 10년 만에 거의 두 배로 늘어나 30억에 육박하게 된다.
그 결과, 한국의 공장들에겐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지게 된다. 중국으로 옮기거나, 국내에 남아서 더 싼값에 생산하는 다른나라 기업들과 극심한 경쟁을 벌이거나. 이런 흐름 탓에 이미 1997년 이전에 부산의 신발산업과 대구의 섬유산업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일자리는 줄어든다.
중국의 세계시장 편입이 일으킨 충격파
그는 중국의 WTO가입과 그 여파를 '2001년 체제'로 명명하며, "2001년 체제로 인한 한국의 불평등 증가는 1997년 외환위기와 비슷한 규모"라고 진단한다.
최병천이 꼽는 다음 변곡점은 2008년이다. 월가에서 발생해 전세계를 뒤흔든 금융위기로 인해 2008-2010 기간중 불평등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병천은 이를 "2008년 불평등 미스터리"라고 부르며, 이렇게 썼다. "역대 정부 중 가장 시장친화적인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는데 왜 불평등은 줄어들었을까? 심지어 이명박은 집권 직후 종합부동산세와 재산세의 일부 환원 조치를 취했다. 시장친화적 정부, 재벌친화적 정부, 감세 정부가 등장하니 불평등이 줄어들었다? 신자유주의, 재벌유착, 비정규직 남용을 한국경제 불평등 확대의 3대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진보세력의 주장을 이처럼 명쾌하게 무력화하는 경우가 있을까 싶다."
이렇게 도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뒤 그는 여러가지 논증을 통해 '선진국발 경제위기는 (국내의) 상위계층 소득을 감소시켜 불평등을 축소시킨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2015년 이후 불평등은 다시 감소하기 시작하는데, 이것도 그 전해에 중국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라고 최병천은 설명한다. 2014년 시진핑이 선언한 새로운 경제정책 '신창타이'가 한국의 대중수출을 감소시켰고, 그 결과로 국내 경제적 불평등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신창타이'는 한자로 '새로운 상태(新常態)' 즉 '뉴 노멀(New Normal)'을 의미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가 몇년간 지속되는 사이, 중국경제는 바뀐 환경에 대한 새로운 적응을 시도한다. 시진핑은 내수를 키우고 중간재 생산을 늘리고 군사력 강화까지 염두에 둔 산업고도화 정책을 본격화한다.
<성장=좋은 것, 불평등=나쁜 것> 과연 맞을까?
성장과 불평등의 관계에 대한 기본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꺼낸 것은 쿠즈네츠 곡선이다. GDP(국내총생산) 개념을 만들고 197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쿠즈네츠가 1950년대에 내놓은 가설인데, 경제가 성장하면 처음엔 소득불평등이 커지지만, 성장이 어느 정도를 지나면 불평등은 다시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쿠즈네츠 본인은 여기에 좋다/나쁘다와 같은 윤리적 가치판단을 부여하지 않았다. 정책'활동가'인 최병천은 여기에 좋다/나쁘다는 판단을 가미한 해석을 시도한다. 최병천에 따르면,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을 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도시화/ 산업화/ 기업의 대규모화를 수반한다. 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불평등이 나타난다. 쿠즈네츠 곡선의 앞부분이다. 이런 불평등은 말하자면 '좋은 불평등'이다. 소득과 고용이 증가하는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쁜 불평등은 어떤 불평등일까? 소득과 고용이 줄어들면서 나타나는 불평등은 나쁜 불평등이다. 그는 이를 4분면으로 설명했다.
A사분면(좋은 불평등)의 양상은 신흥공업국 성장 초기에 나타난다. 덩샤오핑이 동부연안의 개혁개방을 밀어붙이며 경제가 급성장한 1990년대 초기 중국이 대표적 사례다. 소득이 늘면서 불평등도 감소하는 B사분면 ('좋은 평등')은 20세기 초반 포드 자동차의 생산혁명으로 노동자의 소득이 늘고 소비력이 증가하던 시기, 유럽 복지국가의 전성기 등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소득이 줄면서 불평등은 악화되는 '나쁜 불평등(D)'은 소련 공산주의 붕괴 직후 러시아의 혼란상을 보면 된다. (그 혼란을 수습한 게 푸틴이고, 그 덕으로 지금까지 푸틴은 국내에서 높은 지지율을 누릴 수 있었다.) 소득도 줄고 불평등도 줄어드는 '나쁜 평등(C)', 즉 '다 같이 못 사는' 경우는 공산혁명기의 중국이나 북한,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나라를 들 수 있다.
"불평등은 좋은 원인으로 증가할 수 있고 나쁜 원인으로 증가할 수 있어요. 불평등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건 1차 방정식인데, 실제 현실은 1차 방정식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력, 계층 사다리, 불평등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을 가져야지만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고 실제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요. 운동권들이 관심 있는 것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지나치게 단순한 접근이 불평등을 키웠다
여기에 '토건적폐'론을 주장하면서 토목 건설 등 SOC 예산까지 삭감하자 일자리는 더 줄어든다. 2018년, 소득1분위(제일 가난함)의 소득은 급감한다. 상위 5분위의 소득은 급증한다.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그 결과가 이런 그래프다.
1층 밑에 지하실이 있었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실패한 이유
그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임금 불평등과 소득 불평등의 상충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2) 진짜 하층이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3) 저임금 노동자의 실체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소득주도성장은 '너무 좌파적'이어서 실패한 게 아니고, 진짜 하층민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실패한 정책이 됐다고 그는 지적한다. 한국사회에서, '일하는 빈곤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일단 취업을 하면 정책 개념상 빈곤(중간소득의 ½ 미만)은 면한다는 것이다. 즉, 빈곤타파의 핵심은 취업이다. 비정규직이든 저임금 일자리든 일단 가구 구성원 중 취업자(자영업자나 자영업자를 돕는 가구원 포함)가 1명 이상 있으면 빈곤에서 탈출하게 된다고 그는 책에 썼다.
'지하실'의 진짜 저소득층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불평등 완화
저임금 문제 해결의 열쇠는? ...<좋좋소>가 시사하는 것
따라서, '시급 1만원도 못 주는 사업장은 망해도 싸다' 라는 말은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망해야 할 가게와 소기업이 너무너무 많다.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가나. 최저임금을 우리보다 많이 주는 서구의 일부 대도시나 유럽 복지국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엄청난 부를 축적했거나 저부가가치 산업 및 자영업자의 비율이 우리보다 낮은 곳들이다.
로빈후드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두 사람 A와 B가 있다. 계절은 겨울이다. A는 반팔 반바지밖에 못 입고 떨고 있다. B는 따뜻한 겨울옷을 입고 있어 아무 문제가 없다. A는 왜 추위에 떨고 있을까? 추위를 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가 성장해야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진보 일각에선 기업의 생산성이 향상되면 고용이 줄어들까봐 겁내기도 하는데, 이것도 달리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가정을 꺼냈다.
100명이 1만 원짜리 물건 100개, 즉 100만 원어치 물건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생산성이 2배가 되면 50명만으로도 100만 원어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노동투입량'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럼 고용이 절반으로 줄어드나? 이 회사만 떼어놓고 보면 그런 걱정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거다. 우선, 물건값을 싸게 만들어 판매를 늘릴 수 있다. 또, 소비자 입장에선 100만원 내야 100개 사던 걸 50만 원만 내고도 100개를 살 수 있게 된다. 소비자는 그 50만원으로 다른 소비를 할 수 있다. 영화를 더 볼 수도 있고 옷을 더 살 수도 있고 고기를 더 사 먹을 수도 있다. 그러면 해당 산업에서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생산성 경쟁은 국제적으로 벌어진다. 생산성이 높은 국가의 일자리가 더 늘어난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국가는 일자리도 줄어든다. 일자리가 줄어들면 불평등은 악화된다.
저성장해도 잘 나누면 평등? 그런 나라는 침략 위기 겪는다
"유럽식 복지국가가 가능했던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산업혁명 이후 아시아에 대한 초격차, 두 번째는 미국의 군사력과 핵에 의한 나토(NATO) 체제에 대한 무임승차.... 이 두 가지였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정치와 불평등 문제
불평등 완화를 위해선 '이건 좌파정책 이건 우파정책' 따지지 말고 정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데 일자리도 없는 가장 하층의 노인들을 위해 박근혜가 제안한 기초연금을 노무현이 받아들여 실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선택한 정책이 여러 단계를 거쳐 현실에 미칠 영향도 이모저모 신중하게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장 무엇이 더 우리 진영의 표를 모을 수 있는지만 따지는 지금의 정치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보수정치인 진보정치인 할 것 없이, "한국 경제에 불이익도 안 미치고 순기능도 안 미치는" 문제를 갖고 "허세 싸움, 종교 다툼"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는 세대 효과에 사로잡힌 정치의 문제를 지적했다. 지금의 노인세대가 20대였을 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난, 그리고 북한에게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에겐 지금도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4050 세대에겐 20대 때나 지금이나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회귀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정치는 일종의 네트워크 산업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누가 땡겨줘야 금배지를 단다." 한국정치는 구조적으로 변화에 둔감하도록 설계돼 있다. 같은 86세대여도 기업에 있는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 망하지만, 정치하는 86은 변하면 망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세대교체되어야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법도 보다 자유롭게 모색할 수 있다.
그게 될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을까. 그는 느리지만 언젠가 바뀔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30년 몸담아온 진보진영을 상대로 경제의 현실을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게 자신의 소명이라고 했다. 변혁은 변방에서 시작된다지만 완전 변방은 변혁을 할 역량을 가질 수 없단다. 자신처럼 운동권 중심부 근처를 맴돌아서 어느 정도 네트워크는 있고 돌아가는 것도 알지만 비주류인 사람이 말해야 그나마 얘기를 들어준다고 했다. 진보진영 밖에서 뭐라고 비판하든, 진보진영 안에서는 관심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좋은 자리에 불려들어가 일할 기회를 마다하고 얼마 안되는 공무원연금 (한동안 국회 보좌관 일을 했다.)을 깨서 그 돈으로 버티며 책을 썼다. 그리고 그의 글과 말이 잘못 굳어버린 진보의 경제관에 균열을 낼 수 있도록 나름의 싸움을 밀고 가는 중이다.
두 시간 가까운 대화를 마치면서, 보수진영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진영의 강성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종교 수준의 믿음에 도전하고, '그게 아니다. 세상은 바뀌었다. 현실의 데이터를 현실 그대로 보고 말하자. 좋은 정책에 보수 진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야 합리적인 토론의 공간이 열린다. 그래야 뿌리깊은 문제의 해결에 한발 더 가까워진다.
(구성·편집: 이현식 D콘텐츠제작위원 / 콘텐츠디자인: 박수민)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hyunsi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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