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미안하다, 치마저고리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2022. 10.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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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일본 법원으로 들어가는 조선학생들(위). 광화문 거리를 걷는 한복입은 젊은이들(아래).ⓒ News1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광화문에 가면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고 친구와 재잘거리며 대로를 걷는 소녀들을 종종 본다.

바로 얼마 전까지 특정한 때가 되면 일본의 법원 앞에서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위의 광화문 한복 젊은이들과 다름없는 발랄함을 보인다. 재판 결과가 나오면 내가 어른이므로 느껴야 할 온갖 부끄러움에 그들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두 풍경 사이에는 자신을 긍정하는 정체성과 자신을 부정당하는 정체성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다.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소녀들은 '자신을 보라' 한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 학생 역시 '자신을 보라' 한다. 그러나 전자는 그 행위가 '자랑'이며 후자는 그 행위가 '저항'이다.

1960년 치마저고리를 입기 시작할 때의 조선학교 사진. 자세히 보면 치마저고리와 양장교복이 혼재되어 있다. (출처=도쿄조선중고급학교 홈페이지)ⓒ News1

어째서 일본의 한복판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의 학생들이 '저항'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을까? 원래부터 '치마저고리 교복'은 저항의 상징이었을까? 차별을 딛고 당당한 조선 사람으로 살아가자는 재일조선 여성의 저항의 상징?

결론적으로 '오직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부정당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긍정하는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저항'보다는 '자랑'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조선 학생의 '치마저고리 교복'의 연원은 이렇다.

1945년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재일조선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민족교육'이었다. 누구는 귀국을 하고 누구는 귀국을 조금 미루고 하면서 일본을 떠날 날만 고대했다. 고향 땅이 남북으로 쪼개지고 고향 사람들이 좌우로 분열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조선 사람들의 민족교육, 조선학교를 빨갱이 교육한답시고 탄압하고 급기야는 강제로 폐쇄했다. 해방된 민족인데 해방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덩달아 일본 사람들은 온갖 증오와 혐오 가득한 시선을 던진다. 전쟁, 휴전을 거치며 고국으로의 길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일본에서 미국이 물러나고 일본 국적이 강제로 상실되자 너희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며 민족교육 하는 걸 방해치 않았다. 그래서 다시 세워지던 조선학교.

가난한 재일조선인이 가장 바랐던 '우리의 학교'는 돈이 없었다. 변변한 책걸상도 바람을 막아줄 창문도 없었다. 흙바닥에 양말도 없이 구멍 난 신을 신고 언 발을 비비던 어린 학생들. 1957년 조국에서 1억엔이 넘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왔다. 그 후에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그만한 돈들이 온다. 교과서도 오고 수업 교재도 오고 조국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희귀한 동물도 박제되어 온다. 그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다.

1959년 겨울에는 조국에 가는 배가 출발했다. 이 '귀국 운동'을 통해 북으로 간 재일조선인이 1984년까지 9만명에 달한다. 첫 배가 출발하고 2년 후인 1961년까지 7만명이 건너갔다. 이렇게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는 '고마운 조국'을 가진 재일조선인이 자신을 진심으로 긍정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점에 '치마저고리 교복' 탄생했다.

인용해 보자. '귀국 붐'의 열기는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을 둘러싼 재일조선인 사회의 민족 자주 의식을 고양시켰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 스타일이나 생활 문화의 변혁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한동현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 교복'의 의미」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배지원, 조경희 엮음. 선인. 2017))

즉, 일종의 '조국 지향'적 민족주의가 여성들의 치마저고리 착용이라는 현상을 가져왔다. 이것은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 따른 재해석을 통한 '민족적 부흥(ethnic revival)'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사한 현상이 조선학교 내에서도 일어나 여학생들의 자발적인 치마저고리 착용으로 나타났고 나아가서는 제복화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동현 「조선학교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 교복'의 의미」『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배지원, 조경희 엮음. 선인. 2017))

칼질 당한 치마저고리 교복(김명준 감독 제공)ⓒ News1

BTS와 오징어게임 같은 K컬쳐가 세상을 지배하는 요즘, 광화문 거리에 한복 입은 젊은이들의 활보와 1950년대 후반 일본의 도심을 자랑스럽게 걷는 고마운 조국을 가진 조선 학생의 치마저고리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까? 그렇지 않다. 둘 사이에는 '자랑할만한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랍다. 꼰대들의 강요도, 학교의 규칙도 아니었다. 오로지 재일조선 여성 스스로의 결정으로 제법 긴 세월을 거쳐 '교복'으로 탄생했다. 당시의 재일조선인 사회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극히 자발적으로 민족과 조국을 자랑할 수 있는.

하지만 이 긍정의 이미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바꾼다. 치마저고리가 난도질당한다. 이른바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 1987년 KAL기 폭파의 주범 김현희가 일본의 공항에 내린다. 유창한 일본어를 납치된 일본 여성에게 배웠다고 말한다. 이때를 계기로 '증오와 혐오'가 싹트기 시작했다. 1994년, 1998년 핵 위기, 미사일 위기 등 북에서 날아오는 소식은 일본의 매스컴과 평범한 사람들을 광분시켰다.

가장 눈에 띄는 복수의 대상은 도심을 걷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린 조선 학생'이었다. 2002년 북일 정상화 교섭을 위해 북에 방문한 고이즈미 총리는 해 오라는 '국교 정상화'는 뒤로하고 '납치 문제'만 가져왔다. 다시 들끓는 분노가 치마저고리를 덮쳤다.

여전히 '치마저고리'는 민족의 상징, 자긍심의 상징이지만 거기에 '차별의 상징'이 더해졌다. 그것을 입는 학생은 한편으로 자긍심을 한편으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학교 밖은 두려움의 장소요, 안은 자긍심의 장소였다. 재일조선인 사회는 어린 학생들이 더 이상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2 교복(양장)이 신설되었고 부모들은 치마저고리 교복과 제2 교복이라는 이중 부담을 떠안았다. 1999년 무렵부터였다 한다.

어느덧 이 흐름은 전체를 지배했다. 분노에 찬 군중뿐만 아니라 매스컴과 법과 정부까지도 재일조선인 혐오에 나섰다. 거리에서는 연일 재일조선인을 죽이자는 데모가 열린다. 일본 사회에 살면서 자신의 본명을 숨기듯이 치마저고리도 학교라는 울타리 안으로 숨어들었다. 결국 제2 교복이 대세가 되어갔으며 치마저고리는 '행사'용이 되었다.

한동현 교수의 책 표지. (출처='치마저고리 제복의 민족지 _ 탄생과 조선학교의 여성들' Pitch Communication. 2015.)ⓒ News1

일본의 법원 앞 거리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일군의 조선 학생들이 줄을 선다. 그 주위엔 보호자들이 함께한다. 판결이 내려진 법원 앞은 분노와 억울함이 지배한다. 이 어린 학생들, 이 가냘픈 치마저고리를 입은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아이들. 아이들까지 차별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2010년 이후 고등학교 수업료 무상화에서 제외된 조선 학생들은 저항의 '표현'으로 치마저고리를 입었고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시작했다. 2022년 현재 다섯 군데 재판에서 그들의 인권은 모두 무참히 짓밟혔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재일조선인의 상징, 조선학교의 상징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학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한국에서 방문단이 조선학교에 입장하면 으레 '치마저고리'를 예쁘게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맞이한다. 우리말로 노래하고 조선 무용을 선보인다. 우리는 미안하고 대견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부여잡는다. 이역 땅 일본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가? 남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 있다. 늘 찝찝한 장면이었다.

이 천편일률적인 풍경이 한동안, 아니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재생될 전망이다)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서로를 알아가는데 가장 빠른 도구가 상징이니까. 그런데 그 상징의 부담을 왜 여학생만이 짊어져야 하는가?

여기에 필자의 원죄가 있음을 고백한다. 2000년대 중반, 조선학교가 한창 한국 사회에 주목받을 즈음에 '우리학교'라는 영화로 '상징으로서의 치마저고리'를 확산시킨 당사자 중 한 명이 필자다. 치마저고리가 여름에 얼마나 덥고 겨울에 얼마나 추운지는 입어 본 학생들만이 안다. '우리학교'에는 심지어 이런 장면도 있다. "왜 남학생들은 블레이져 속에 내복을 입어도 되고, 여학생들은 치마저고리에 겉옷을 입어서는 안 됩니까?" 어느 중급부 여학생이 선생님을 향해 볼멘소리를 하는 장면이었다. 예쁘긴 하지만 불편하고 거기에다 '표적'이 되는 부담까지… 이를 잘 알면서도 영화 '우리학교'의 포스터는 역시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학생이다. 내 성인지 감수성이 거기까지였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일본의 도심에서 일상적으로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은 조선 여학생을 볼 수 없다. 그야말로 상징이 되어 예술발표회나 동포 행사, 집회 등에서나 입는 옷이 되었다. 안타까워해서는 안 된다. 동포사회의 오랜 고민과 갈등이 내린 결정이다. 대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자랑스럽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일상을 선택할 권리를 앗아간 사회와 역사를 똑똑히 기억해야겠다. 그 사회와 역사에 우리의 얼굴도 큼직하게 아로 새겨져 있으니까.

김명준 조선 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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