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N수학] 역설의 꼬리표 달린 정리
역설이 아닌데 역설이라고 불리는 수학 정리가 있습니다. 바로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입니다. 논리적 모순이 하나도 없는데, 대체 왜 역설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됐는지 알아볼게요.
근사한 속임수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이 없기 때문에 사실 바나흐-타르스키 정리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릅니다. 그러나 이 정리의 결론이 직관과 크게 어긋나는 바람에 역설이라는 꼬리표가 달렸습니다.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 무엇인지 소개하기에 앞서 한 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영상을 보겠습니다.
이는 근사한 속임수입니다. 큰 사다리꼴 조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크기가 살짝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주어진 도형을 다섯 개의 조각으로 쪼갠 뒤 이리저리 옮기는 것만으로 도형이 더 커지겠어요. 그런데 이것이 바나흐-타르스키 정리와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내용 같지만 놀랍게도 바나흐-타르스키 정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만큼이나 합당한 수학 정리입니다. 앞서 본 초콜릿 영상과 달리 바나흐-타르스키 정리는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정확한 수학적 논증을 통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선택 공리로부터
한 가지 유념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바나흐-타르스키 정리에서 말하는 구란 무한히 많은 점으로 이뤄진 수학적인 대상입니다. 현실의 구는 유한한 개수의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수학적인 구와 다릅니다. 따라서 현실의 구를 자르고 재조합해서 두 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요컨대 수학적 영역과 물리적 영역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바나흐-타르스키 정리가 성립하는 이유는 현대 수학 체계가 ‘선택 공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공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공리란 수학자들이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명제입니다. 일반적으로 현대 수학 기초론에서는 총 9개의 공리를 사용합니다. 선택 공리는 그중 하나입니다.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어렵게 들리는데, 구체적인 예시를 들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개의 서랍으로 된 서랍장을 떠올려 봅시다. 1층 서랍에는 남방이, 2층 서랍에는 책이, 3층 서랍에는 필기구가 있습니다. 선택 공리에 따르면 1층 서랍에서 남방 한 벌을, 2층 서랍에서 책 한 권을, 3층 서랍에서 필기구 한 개를 골라서 가져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무한히 많은 서랍장
이렇게만 보면 선택 공리는 정말 당연합니다. 그러나 선택 공리는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선택 공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바나흐-타르스키 정리와 같이 기괴한 결론이 수없이 많이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선택 공리가 이토록 위험한 이유는 서랍이 무한히 많은 서랍장, ‘무한집합’에도 선택 공리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 공리를 무한집합에 적용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무한히 많은 서랍을 가진 서랍장을 생각해 봅시다. 이 서랍장의 1층 서랍에는 1장짜리 출력물이, 2층 서랍에는 2장짜리 출력물이, 이런 식으로 n층 서랍에는 n장짜리 출력물이 보관돼 있습니다. 비록 서랍이 무한히 많아졌지만 선택 공리에 따르면 여전히 각 서랍에서 출력물을 하나씩 골라 한 바구니에 넣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구니에 n장짜리 출력물이 하나씩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같이 선택 공리를 무한집합에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입니다. 바나흐-타르스키 정리의 요점은 구를 이루는 무한히 많은 점을 방향성에 따라 다섯 개의 묶음으로 적절히 분류할 수 있다면, 각 묶음을 이리저리 회전하고 이동시킴으로써 기존의 구와 똑같은 크기의 구를 하나 더 만들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필자소개
최정담 작가. KAIST 전산학부에 재학하며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 북, 책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학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최근 《발칙한 수학책》을 냈다.
※관련기사
수학동아 10월호, [역설 나라의 앨리스] 제 9 장. 역설의 꼬리표 달린 정리
[최정담 수학 스토리텔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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