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임박한 노인들의 나라, 대책은 각자 알아서?
“오늘 술자리는 대기업 법인카드 힘을 빌리는 건가요? 자, 무슨 정보가 필요해 부르셨습니까.” 싱거운 농담에 선배는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나 지난달에 퇴직했어.” 아차, 말실수를 사과했지만 선배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3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되지 않더군.”
인사과에 찾아갈 때 선배는 이런 풍경을 상상했다고 한다. “앞으로 계획은 세워두셨습니까?”라는 오지랖 넓은 인생 상담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매뉴얼에 적힌 발언이라 할지라도 “30년 동안 회사를 위해 일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격려 정도는 기대했다고 한다. 담당자는 거두절미 두 가지 선택지를 내놓았다. “정년까지 3년 채우시든지, 3년 치 급여를 한꺼번에 받고 지금 나가시든지, 결정하시면 됩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먹을까 컵라면 먹을까 고민하는 일처럼 간단히 말하니 좀 서글펐다고 선배는 소감을 말했다.
생각하면 아뜩한 일이다. 줄곧 ‘형’이라 불렀던 인물의 일상에 ‘퇴직’이란 그림자가 겹치게 될 줄이야. 물론 우리도 언젠가 떠날 운명이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 하지만 정년(停年)이란 낱말은 여전히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며칠 전 신문에 ‘1973년생이 정년을 맞는 10년 뒤’라는 표현을 봤을 때 세월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하긴 요즘 세상에 정년이 어딨나. 84학번 선배가 이렇게 희망퇴직 했고, 대기업 부장인 92학번 동기 또한 앞으로 2년을 버티기 힘들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 갓 쉰인데.
5년 전 선배를 만났을 때 그랬다. “요즘 신입들 스펙을 보면 옛날 내 이력서로는 우리 회사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을 거야”라며 “우리 세대는 축복받지 않았나?” 하고 허허 웃었다. 이 정도면 호인 중에 호인이다. 이번에도 그는 웃었다. “고인 물이 나가줘야지. 쟁쟁한 후배들 있는데.” 앞으로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3~4년은 그냥 놀려고. 그간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죗값 치르고, 여행 다니고 운동도 하고, 그러면서 슬슬 다음 단계로 가봐야지.” 소주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작가 장강명은 소설 ‘재수사’에서 작금 우리 현실을 ‘공허와 불안’이란 두 단어로 요약해 보여준다. 한편으로 공허하고 다른 한편으로 불안하다. 경제적으로 불안하니 추락하지 않으려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하고, 그런 전취(戰取)의 결과물을 돌아보면 공허하기 짝이 없다. 공허하지 않으려고 자기 안의 불안을 계속 재촉해야 한다. 불안하지 않은 세대가 없고 공허하지 않은 계층이 드물다. 가지면 가진 대로 공허, 없으면 없는 대로 불안. ‘대체 만족하는 자는 누구인가’ 싶은 세상이다.
쉰이면 20년은 더 일할 수 있는 나이, 죽음까지도 40년은 남았다. 노후 대책은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니 국가가 개입할 필요 없다고? 과연 그럴까. 앞으로 3년 지나면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60대 이상이 유권자의 40%를 차지하면서 말 그대로 ‘실버 파워’ 세상이 된다. 그들이 정치를 결정하는 세상은 과연 ‘할아버지처럼’ 너그럽고 포용적일까?
이제는 너도나도 출산율 문제를 떠들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노인들의 세상’이라는 쌍둥이 장벽을 마주하게 된다. 출산율도 대책 없긴 마찬가지지만 고령화 대응은 사회적 합의가 달린 문제라 더욱 난제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여전히 ‘바이든’과 ‘날리면’을 갖고만 밤낮 싸운다. 공허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결국 그러다 ‘강력함’을 자랑하는 정치가 세상을 휩쓸게 되지는 않을까, 다시 불안하고 또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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