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이 열정은 글쓰기와 똑같다, 죽더라도 상관없다"

곽아람 기자 2022. 10. 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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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수상 소감에서 언급해 유명해진 마틴 스코세이지의 이 말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82)의 작품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대표작 ‘단순한 열정’을 읽다 보면 드는 생각이다. 1991년 발표한 이 소설에서 에르노는 동구권 외교관인 연하의 유부남과의 불륜을 회고하는 40대 여성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널리 알려졌듯 이는 에르노 자신의 이야기. ‘단순한 열정’ 출간 10년 후인 2001년 에르노는 1988년 9월~1990년 4월 쓴 일기를 모은 ‘탐닉’을 발표한다. 파리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이었던 열세 살 연하 남성과 나눈 밀회의 기록이다.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단순한 열정’은 이렇게 시작한다. 소설은 이어 영화의 성애(性愛) 장면을 삽입과 그 이후 행위에 초점을 맞춰 건조하게 묘사하며 예고한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에서 화자(話者)는 “작년 9월 이후로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준다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오로지 “이브 생 로랑 정장과 세루티 넥타이, 대형 승용차를 유난히 좋아하던” A의 나라에 대한 기사만 읽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과 화장품을 고르고,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와 과일, 각종 음식을 사 두며, 그가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지 상상한다. 원고를 고친다거나 책을 읽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A를 기다리는 것 외의 다른 일에 조금이라도 정신을 빼앗겨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관음증을 자극하며 속도감 있게 읽힌다. 불륜 관계에서 대개 승자는 돌아갈 가정이 있는 쪽이다. 여자는 남자가 오면 시계를 풀어놓지만, 남자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으며 떠날 시간을 가늠한다. 친구들로부터 꽃과 책을 선물받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선 그런 선물을 받은 적이 없다는 걸 떠올리지만 ‘그 사람은 욕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하고 있잖아’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연하남과 사랑에 빠져 세포 구석구석까지 달뜬 연상의 여인 이야기는 흔한 서사지만 “그 사람이 내게 남겨 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같은 노골적인 고백이 때론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화자는 부연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쓰이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테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레바논 감독 다니엘 아르비드가 아니 에르노 작품을 각색해 만든 영화‘단순한 열정’의 한 장면. 2020년 칸영화제 진출작으로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다음 영화

육욕에 휘둘리는 중년 여자의 감정적 배설 정도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소설은 그러나 화자가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며 리비도를 예술혼과 동등한 자리에 놓음으로써 문학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전희(前戲)는 집필의 디테일로, 절정은 탈고(脫稿)로 전이된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2001년 국내 처음 소개된 이래 에르노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은 노벨문학상 발표 다음 날인 7일 교보문고 실시간 판매량 종합 2위까지 올랐다. 남녀 관계의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소설적인 형태의 열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다면서 화자는 말한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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