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차별·혐오.. 한국식 인종주의와 마주하다
일제강점기 식민주의·해방 이후 반공주의
산업화 시기 발전주의 등 시대 담론과 결합
왜곡된 인종주의 뿌리 자라고 더욱 강해져
피부색 넘어 경제력·종교 차별도 나타나
150년 이어온 한국식 인종주의 민낯 탐구
저자 "이젠 관용과 환대의 전통 만들어야"
한 번은 불러 보았다/정회옥/위즈덤하우스/1만7000원
국문으로 발행됐던 ‘독립신문’의 1897년 6월24일자 사설의 일부로, 노골적 인종주의를 엿볼 수 있다. 백인은 ‘바르고’, ‘확실하게’ 같은 긍정적 표현으로 묘사되지만, 동양인은 ‘기울어지게’, ‘밖으로 두드러지게’ 같은 부정적 표현으로 묘사된다. 흑인은 아예 인종 위계의 맨 밑바닥에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주의와 인종차별로 인해 집단적 모멸감과 열등감이 형성된 한편, 일제에 맞서는 민족의식도 동시에 자라나면서 왜곡된 인종주의가 강화됐다. 일본인 교사는 1927년 7월 경성 소의상업학교(동성고 전신)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조선인은 아직도 야만을 면치 못한 인종으로, 위력으로써 하지 않으면 도야하기 불능하다”고 꾸짖었다. 그들은 서양과 일본은 문명국인 반면 한국은 야만국이라고 대비하거나 한국인들은 개같이 교활하고 야만스럽다고 비하하면서 한국인에게 패배감과 수치감, 죄의식을 심어줬다. 가해지는 일제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부재하는 국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른 한편에선 신채호 등에 의한 민족주의가 탄생했다.
해방 이후에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한국식 인종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한 지배세력은 친일 경력으로 지지 기반이 불안해지자 미국이 내세우는 반공주의를 전면 수용했고, 이를 통해 반대세력을 탄압해 정권을 유지 강화했다. 반공주의는 일종의 ‘회로판 역할’을 하면서 인종주의를 강화시켰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이승만정부는 1949년 7월 이 같은 ‘우리의 맹세’를 제정해 학교 교과서는 물론이고 모든 출판물 뒷면에 의무적으로 싣도록 했고 학생들에겐 이를 달달 외우도록 했다.
산업화 시대에는 반공주의와 함께 발전주의가 한국식 인종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즉, 식민 지배를 통해 경험한 민족적 수치와 모욕 감정을 경제적 성공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열망은 경제적 성공과 번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들었고, 이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뿐만 아니라 돈이 많은지 적은지를 따지는 경제적 차별을 동시에 수행하게 했다. 경제적으로 저개발국 출신 외국인에게 특히 차별적 태도를 보이는 한국식 인종주의의 새 특징이 나타났다.
1990년대 이후 막 오른 세계화 시대에선 경쟁 제일주의와 한민족 우월주의가 결합해 현재의 한국식 인종주의를 낳았다. 외부 민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경제적 민족주의는 지나친 자민족 우월주의와 타민족에 대한 배척과 혐오로 이어졌다. 특히 최근 BTS의 노래와 ‘기생충’을 비롯한 영화, ‘오징어 게임’을 비롯한 드라마 등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국 찬양과 타국 폄훼 현상도 인종주의로 변형되기도 한다.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에서 150년 전부터 주요 근현대사와 시대별 주요 담론을 살펴보면서 한국식 인종주의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 역사적으로 탐구한다.
저자는 특히 많은 한국인이 인종주의를 서구의 역사 속 유물로만 생각하고 한국엔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시화되지 않는 점도 주요한 특징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피부색과 민족, 경제력, 종교 등에 따라 혼혈인, 화교, 이주 노동자, 무슬림 등을 타자화돼 일상적 차별을 하고 있는 게 한국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한국식 인종주의 민낯을 대면하는 동시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비롯해 법과 제도를 서둘러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방인을 제한적인 환대가 아닌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누구든지 이곳에서 함께 살며 같은 경험과 역사를 공유한다면, 모두 우리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150여년 전부터 지독한 인종주의자였다. 식민 지배의 경험을 통해 ‘민족’이라는 전통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관용’과 ‘환대’의 전통을 만들 차례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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