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농업 부흥·민생 안정 위해 독자 달력·시계 만들어
인문학자의 과학 탐미
“조선의 임금은 들으라. 짐이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조선은 근자에 대명력을 폐하고 스스로 만든 불손한 기기들로 독자적인 시간을 만들었다. 어찌 대국의 천명을 가벼이 여기고 반역을 꾀하는 것이냐? 짐이 온정을 베푸는 마지막 기회다. 그대들이 살기를 원한다면, 지금 즉시 천문 연구를 중단하고 그 기기들을 스스로 폐하여 제후국의 도리를 다하라.”
도대체 세종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저런 모욕을 당하는 것일까. 이 대사로 볼 때 ‘천문 연구’를 통해 ‘대명력(大明曆)’, 즉 명의 달력을 버렸으며, 조선의 ‘독자적인 시간’을 만든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우리 풍토·작물에 맞는 농법 개발
세종 때만 보더라도 즉위 4년(1422)에 일식 시간을 정확히 맞추지 못한 관리에게 곤장을 친 일이 있었다. 세종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크게 두 영역에서 사업을 벌였다. 하나는 역법을 교정하는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한양의 주야각(晝夜刻), 즉 24절기의 밤낮 길이를 측정하는 사업이었다. 다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역법을 계산하는 문제는 세종 14년(1432)에 드디어 해결되었다.
“역법을 교정한 이후로는 일식·월식과 절기의 일정함이 중국에서 반포한 일력(曆書)과 비교할 때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매, 내 매우 기뻐하였노라.”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0월 30일 을묘 1번째 기사
· 세종 14년(1432) - 천문기구 제작팀 구성
· 세종 15년(1433) - 혼천의
· 세종 16년(1434) - 자격루, 앙부일구
· 세종 19년(1437) - 일성정시의
· 세종 20년(1438) - 흠경각루, 간의대
천문기구 제작의 첫 성과로 만들어진 ‘혼천의’는 물레바퀴로 움직이는 시계 장치와 천체가 새겨진 기기 등으로 구성되어 해와 달, 별의 위치를 관측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표준시계 격인 ‘자격루’는 물이 통에 흘러들어 고이면, 고인 물 위에 있는 살대가 지렛대 장치를 건드리면서 쇠구슬이 굴러 차례로 종과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시계였다. 자격루는 궁에만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접할 수 있는 시계가 필요했다. 그 시계가 ‘앙부일구’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는데,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가마솥이란 뜻의 ‘앙부’와 해의 그림자를 뜻하는 ‘일구’로 이름 붙여졌다.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오목하다 해서 일명 ‘오목해시계’라고도 한다. 오목한 반구 안쪽에는 달력 역할을 하는 가로줄과 시각을 알려 주는 세로줄이 있는데, 해 그림자가 시각뿐만 아니라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나타낼 수 있다. 일하는 시간을 알도록 하기 위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옆에 설치됐으며, 12지 동물 그림으로 시각 표시를 했기 때문에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한자가 새겨진 조선 후기의 것만 전해진다.
이 밖에도 일성정시의, 혼의, 혼상, 규표, 간의, 소간의, 흠경각루(옥루), 정남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등이 제작되어 자격루, 앙부일구와 함께 종합 천문대인 간의대에 설치되었다. 이 기구들로 낮의 길이가 측정됐으며, 이 낮의 길이를 하루의 길이에서 감산하여 밤의 길이가 계산되었다. 비로소 한양의 주야각 측정 사업이 완수된 것이다. 세종은 조선의 일월식과 절기 계산 등에 적합한 역산법과 한양의 주야각을 측정하여 세종 24년(1442)에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했다. 그와 동시에 조선의 달력을 제작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세종이 감행한 역서의 편찬이나 천문관측 기기, 그리고 독자적인 달력 제작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영화 ‘천문’의 대사에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세종의 마음속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있었기에 이런 위험을 감행한 것일까.
세종 14년에 터득한 ‘역법 교정’은 세종 2년(1420) 성산군 이직(李稷)의 건의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3월 2일 1번째 기사) 있다. 이 같은 건의는 조선 자체의 날짜 계산이 명나라의 달력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로부터 받아온 중국 달력은 총 101부로 턱없이 부족했기에 손으로 베낀 달력이 배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원칙적으로는 12월 안에 전국의 관리들에게 보내져야 했지만 새해가 훨씬 지나서야 배부되었다.
개간 사업 통해 토지 면적도 늘려
우선 세종 11년(1429) 5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세종은 우리 풍토와 작물에 딱 들어맞는 농법을 개발하도록 했다. 그래서 간행된 우리 최초의 실용 농학서 『농사직설』은 씨앗 보관, 땅을 가는 법, 모판 만드는 법, 비료 만드는 법뿐만 아니라, 삼·벼·기장·조·콩·팥·녹두·보리·밀·참깨·메밀의 재배, 특히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 등을 자세히 소개한다. 이 책은 간행되자마자 바로 다음 해에 전국 각지에 보급되어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또한 세종 시대가 유독 가뭄과 흉년이 많았던 탓에 농업 생산량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국가 조선에서 강수량은 생존과 직결됐는데, 조선 초기 국가 경제는 가뭄 때문에 파탄에 이르렀고 굶주린 백성들은 흙을 파서 떡과 죽을 만들어 먹을 지경이었다. 조선의 그 어떤 왕들보다도 더 많은 기우제를 지냈던 세종이었지만, 그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세종은 쇠로 된 원통으로 측우기를 제작해 대 위에 올려놓고 빗물을 받아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하게 하였으며, 수표로 하천의 수위를, 풍기로 풍향과 풍속 등 바람의 변화를 알도록 했다. 이로써 지역별 통계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농사에 적용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 시대에 있었던 역법의 발전과 농법의 보급은 농업 경제의 부흥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일환으로 나온 남해의 개간 사업 및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 4군 6진의 설치 등은 결국 고려 말에 70만 결이었던 농사 가능 토지 면적을 170만 결까지 확대시켰고, 토지 1결당 생산량을 고려 말 300두에서 1200두까지 올라가게 했다.
소득 증대를 통한 경제 활성화야말로 국가 운영을 담당하는 위정자들의 가장 큰 몫이다. 우리는 지금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민생 안정을 고민하는 이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궁핍한 시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언론에 나온다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18일부터 앉아서 날새기를 기다렸다. 이 때문에 병이 났으나 외인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여러 대신이 알고 고기찬 드시기를 청하였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7월 28일 을미 2번째 기사
내일 아침 신문에 이런 톱기사 제목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000, 금번 경기 불황으로 국민들을 염려하여 식음을 끊고 십여 일 동안 밤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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