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스러운 샴페인을 날 위해 터뜨릴 날 올까

한은형 소설가 2022. 10. 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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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돔 페리뇽
영화 ‘미저리’에서 주인공 애니 윌크스가 소설가 폴 셸던이 좋아하는 샴페인 ‘돔 페리뇽’을 준비하는 장면. / 컬럼비아 픽처스

영화 <미저리>의 시작은 기가 막히다. 물론 좋다는 의미에서. 첫 장면은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 한 대와 성냥 한 개비, 두 번째 장면은 빈 샴페인 잔, 세 번째 장면은 샴페인 에서 칠링되고 있는 돔 페리뇽 한 병. 이렇다. 와, 이 정도면 한숨이 나오면서 막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침을 삼키면서 속으로 외쳐본다. 어서 샴페인을 따라고, 어서 담배에 불을 붙이라고. 그래서 나 대신 목을 축이고, 타오르는 불을 만들어달라고. 나의 갈증과 나의 욕망을 대신 실현시켜 달라고. 나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곧 돔 페리뇽은 열린다. ‘퐁’하는 상쾌한 소리와 함께.

빼먹은 게 있는데,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와 돔 페리뇽을 대기시키고 있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다. 그는 소설가다. 타이프라이터로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쏟아내고 있는 게 네 번째 장면이다. 다섯 번째 장면은 막 다 쓴 원고에 “The end”라고 연필로 쓰는 것. 제목은 아직 없어서 ‘무제’라고 적을 수밖에 없는 그 원고에.

그러니까 그게 아직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쏟아부은 소설을 막 끝냈고, 그 보상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샴페인 한 병을 마신다. 멋지다. 한때 담배를 피웠었으나 이제는 피지 않는 사람일 것이고, 술을 즐기지만 평소에 돔 페리뇽을 마시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딴에 대단한 것을 끝내고서 매일 하는 것을 하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도 좋겠고, 요즘 말처럼 플렉스라고 해도 좋겠는데 그는 뭔가 ‘색다른 재미’를 원할 것이다. 그동안의 금욕과 절제와 자기학대에 대한 끝내주는 보상으로서. 그게 럭키 스트라이크고, 또 돔 페리뇽이라서 납득이 간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고 할까.

돔 페리뇽이 어떤 술인지 먼저 말해야 한다. 1638년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피에르 페리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아이는 훗날 수도사가 되고, 일생을 샴페인에 바친다. 피에르 페리뇽의 일생을 바친 샴페인이 돔 페리뇽이다. Dom은 프랑스어에서 성직자를 부르는 칭호. 그러니까 돔 페리뇽은 ‘페리뇽 경’이라거나 ‘페리뇽 수도사님’ 정도의 뜻이다.

이 분이 왜 위대한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실수로 와인에 기포가 생성된 걸 발견한 후 샴페인 제조를 시작했다는 것. 두 번째는 샴페인용 코르크를 발명했다는 것. 기포가 있는 와인이 원래 있기는 했는데 튀어 오르는 와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나 코르크가 망가지는 게 고질적인 문제였다고 한다.

다시 <미저리>로 돌아와서. 나는 그 장면을 보고 결심했다. 책 한 권을 끝낼 때마다 샴페인 한 병을 따겠다고. 돔 페리뇽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지만 누가 따주면 안 된다고. 바로 내가 따야 한다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거의 끓어오르는 듯한 샴페인의 위력을 느끼다가, 이내 들려오는 ‘퐁’하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엔도르핀이 분비되면서 그간의 마음고생이 씻겨나갈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의식을 치르기 위해 샴페인만을 두는 와인 냉장고를 사려고 했었다. 내게는 작긴 하지만 와인 냉장고가 있는데, 거기에 샴페인을 두고 싶진 않았다. 12도라는 샴페인에 최적화된 온도로 맞춰두고 싶었고, 평소엔 봉인되어 있다가 소설을 끝냈을 때, 그러니까 <미저리>의 그 남자처럼 ‘끝’이라고 쓰는 그 순간에만 열려야 했으니까. 나는 좀 강박적인 면이 있는데, 샴페인에 대해서도 그런 편이다.

매일 아침을 샴페인으로 시작했다던 처칠이나 마릴린 먼로처럼은 되지 않는 것이다. 화이트 와인이나 레드 와인은 아무 때나 따지만 아무래도 샴페인은, 샴페인이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만 따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좋은 일’이 잘 없으므로 잘 못 따게 되는, 샴페인 엄숙주의자가 바로 나다.

나폴레옹 스타일도 아니다. 한때 유럽의 황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샴폐인은 전투에서 이겼을 때는 마실 가치가 있고, 졌을 때는 마실 가치가 있다.” 멋진 말이다. 나폴레옹님이 하셨다니 더 장엄하고, 더 웅장하다. 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최소 금으로 된 잔에 샴페인을 따라 마시며 패배의 이유를 복기해야 할 것 같다. 이런 건 따라 할 수가 없다. 샴페인을 마시며 복기할 그런 거창한 패배가 내게 있을까 싶어서.

<미저리>에 나오는 돔 페리뇽은 빈티지 라인이다. 이 영화는 1990년에 개봉했는데, 1982년 빈티지라고 라벨에 적혀 있다. 1982년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돔 페리뇽은 만들고 나서 8년 동안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다가 시장에 출시한다고 한다. 1982년 빈티지는 1974년 무렵에 만들었다는 말이다. 왜 8년인가 하면, 돔 페리뇽을 만드는 분들은 시음 적기가 만든 지 8년 후라고 보고 있어서다. 또, 포도가 좋지 않은 해에는 샴페인을 만들지 않는다고.

이게 다가 아니다. 돔 페리뇽에는 ‘샴페인은 3번의 시기를 맞이한다’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시기가 앞에서 말한 8년 후고, 두 번째 시기는 15년 전후로 찾아온다. 그리고 30년 전후로 마지막 절정이 온다. 돔 페리뇽의 상위 라인에 P2와 P3가 있는데, 이것들이 두 번째 절정과 세 번째 절정을 담은 샴페인이다. 이 P는 Plénitude플레니튀드의 줄임말이고, 프랑스어로 풍만함, 완전함, 또, 충만함, 절정이라는 뜻.

내게 샴페인이란 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의식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의식의 핵심은 의전이다. 스스로에게 하는 의전. 이 의전에는 계획이 있어야 하고 환대가 있어야 하고 끓어오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비등점이. 열정이 최고조에 달한 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 돔 페리뇽 한 병을 따고 싶은데, 그렇게 최선을 다해 의전을 하고 싶은데, 그날이 오겠지? 이제 좋은 일을 만들고, 돔 페리뇽만 사면 된다. 내게는 <미저리>와는 비교가 안 되게 아찔한 샴페인 잔도 있고, 또 그보다 멋진 샴페인 버킷이 있으니까. 이제 풍만하거나 완전한 기분만 갖추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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