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용 발전기·버너 사재기 붐, 유럽 에너지 위기 현실로
김진경의 ‘호이, 채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왼쪽)이 프란스 팀머만스 유럽 그린딜 부의장(오른쪽)과 함께 지난 7월 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회원국들이 내년 봄까지 가스 사용을 15% 줄이는 목표 설정 방안 등을 담은 가스 수요 감축 계획을 제안하고 있다. [AP=연합뉴스]](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210/11/joongangsunday/20221011131050384uork.jpg)
별일 있겠나 싶었는데 P의 말을 듣고 있으니 유럽 에너지 위기가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다. 그는 재생에너지기업에서 일하는 데이터 과학자다. 근거 없이 부풀려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초와 성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날 저녁 바로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족 수대로 캠핑용 침낭을 구입했다. 영하 15도에서도 따뜻하게 잘 수 있다니 난방이 중단되면 침낭을 쓰면 될 것이다. 휴대용 가스버너도 구입한 후 P에게 “조언해 줘서 고맙다. 우리도 이제 좀 대비가 된 것 같다”고 하니 그는 이미 한발 더 나아가 있었다. “우리 집은 여차하면 올겨울을 태국에서 보낼까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서 어렵게 버티느니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미리 비행기표 사 두려고요.” 취사도, 난방도 안 되는 위기에 과연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유난을 떤다고 P를 비난할 수는 없다. 최근 몇 주 스위스 언론은 에너지 위기를 경고하는 기사로 넘치고 있다. 스위스 최대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휴대용 발전기 판매가 1년 전보다 9배 늘었다고 한다.
최악 상황 땐 취리히 하루 12시간 단전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왼쪽)와 키릴 페트코프 불가리아 총리가 지난 7월 8일 양국을 연결하는 가스 파이프라인 개통식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210/11/joongangsunday/20221011131050746kvrh.jpg)
![스위스 정부의 에너지 절약 캠페인. 실내 온도 유지를 위해 창문을 자주 열지 말라는 뜻이다. [사진 스위스에너지청]](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210/11/joongangsunday/20221011131051073vafs.jpg)
이게 끝이 아니다. 칸톤 취리히 정부는 가능성이 적긴 하지만 ‘나쁨’보다 악화되는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때는 ‘시크릿 플랜’이 가동된다. 이 플랜에는 두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칸톤 취리히를 절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하루 4시간, 다른 쪽에는 하루 12시간 전기 공급을 중단한다. 형평성을 위해 다음날에는 단전 시간을 서로 바꾼다. 두 번째는 칸톤 취리히를 3등분한 다음 돌아가면서 하루 8시간씩 전기 공급을 중단한다. 취리히전력발전소(EKZ) 다니엘 부허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이 플랜은 금고에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어지간하면 꺼내 쓸 일이 없겠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올겨울 최악의 경우 취리히에서 하루 12시간의 단전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의 포스터.‘녹색의 꿈을 중단하고 에너지 공급 안정화를’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 스위스에너지청]](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210/11/joongangsunday/20221011131051364zdkg.jpg)
사람들은 불안한 상황에 혼란을 느낀다. 그 혼란을 반영하는 사건이 있었다. 스위스 타블로이드 일간지 블릭(Blick)이 지난 9월 6일에 ‘난방 범죄자는 감옥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부제목은 ‘에너지 범죄자는 벌벌 떨 것이다. 가스 법규를 위반하면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해진다’였다. 내용을 보면 최대 19도로 정해진 난방 기준을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최대 3000스위스프랑(약 440만원)까지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는 거다. 완전히 틀린 기사는 아니다. 실제 정부가 대응책의 일환으로 이 같은 법규를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아주 나빠질 경우’라는 전제를 빠뜨려 오해를 불렀다. 현재 적용 중인 규정도 아닌데 외신들이 이를 인용해 기사를 재생산하면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경찰이 불시에 방문해 19도인지 확인하느냐’ ‘스위스에서는 방이 20도가 되면 감옥에 가는 거냐’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19도 난방 어기면 신고” 가짜뉴스도
이 논란은 가짜뉴스로 이어졌다. 블릭의 보도 후 트위터에 캠페인 포스터 한 장이 돌기 시작했다. 이 포스터에는 전화를 거는 여성의 모습과 함께 이렇게 쓰여 있다. ‘이웃이 19도 이상으로 집을 난방합니까? 우리에게 알려주세요.’ 그 밑에는 스위스연방 에너지부의 실제 공식 연락처가 안내되어 있고 ‘익명 보장’ ‘사례금 200스위스프랑(약 29만원)’이라는 조건도 붙어 있다. 마치 스위스 정부가 에너지를 낭비하는 이웃을 감시해 신고하라고 독려하는 듯하다. 이 사진은 트위터에서 수천 회 리트윗되고 일부 외신에도 보도됐다. 그러나 이는 조작된 사진이다. 정부는 이런 포스터를 제작한 적이 없다고 밝힌 뒤 현재 사건을 조사 중이다.
에너지 위기는 캠핑 침낭 속에서 며칠 자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위의 가짜뉴스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여론은 이미 요동치고 있다. 한 언론사 토론 섹션에서는 ‘중립국 스위스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대가로 평범한 시민이 고통받는다. 지금이라도 푸틴과 협상하라’는 글이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이민자 혐오로 유명한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은 좌파와 녹색당이 ‘에너지 봉쇄’를 하려 한다며 속지 말라고 주장한다. 탄소 배출 때문에 사용을 줄여 왔던 석유가 다시 전기와 가스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다. 유럽은 올겨울을 잘 넘길 수 있을까.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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