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에 '수퍼 을' 경비원 경험, 모욕이 난치병보다 더 아팠다

서정민 2022. 10. 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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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스타그램’ 인기 작가 김완석
“안녕하세요? 저의 직업은 경비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쳐다본다. 어른들은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도 한다. “어려 보이는데, 왜 그런 직업을 선택한 거예요?” 그럴 때면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경쟁에서 밀려서요.” 순간 분위기는 싸늘해지지만, 비겁하게 거짓말하는 것보단 낫다. 내 직업에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엮어 책을 써낸 김완석 작가. 최영재 기자
김완석(31)씨의 에세이 『위로가 되더라 남에게 건넸던 말을 나에게 건네면』(라곰)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김씨가 스물아홉 살이던 2018년부터 2년간 대구의 한 고급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SNS에 쓴 글을 모은 것이다. “갑과 을이 명확한 세계에서 ‘현대판 머슴’이라 불리는 아파트 경비원은 ‘수퍼 을’일 수밖에 없어요. 모욕적인 말이나 폭행을 당해도 참아야 하고, 가끔은 억울해도 받아들여야 하죠.” 김씨는 그런 날이면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은 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SNS에 글을 썼다. “타인의 기분에 맞춰 살았던 하루를 돌아보니까 남에게는 관대했지만 정작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더라고요. 남이 아닌 나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엮어 책을 써낸 김완석 작가의 책. 최영재 기자
그의 글은 자신을 위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수많은 이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구독자가 순식간에 늘었고, 매 글마다 수십 개의 진심어린 댓글이 달렸다. 그의 글에 달린 “좋아요”는 현재 30만 개를 넘어섰다. “그만큼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거겠죠.”

섬유근육통 앓아 힘든 일 못 해 경비원 선택

김완석 작가가 2017년부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는 위로의 문장들. [사진 인스타 캡처]
경제의 몰락으로 청년들의 취업 문턱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스물아홉살 경비원은 흔치 않다. 사실 김씨는 10년 넘게 희귀성 난치병인 섬유근육통을 앓고 있다. 원인도, 치료법도 명확히 밝혀진 게 없는 병이다. “뇌와 척수의 통증 조절장애 문제로 일반인들은 통증을 느끼지 말아야 할 단계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병이에요. 조금 많이 걸었다 싶으면 발목부터 온몸으로 통증이 퍼져요. 조금만 부딪쳐도 아프니까 어디 돌아다니는 게 두렵죠.”

병명은 섬유근육통인데, 통증은 칼날이 뼈를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 어떨 때는 에어컨 바람이 몽둥이처럼 무겁다. 인터뷰가 있던 날,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김씨는 겨울용 장갑을 끼고 있었고, 배낭에는 파스가 가득했다.

김완석 작가가 2017년부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는 위로의 문장들. [사진 인스타 캡처]
열여덟 살부터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렸고, 전문대에 입학했지만 암 투병 중인 아버지 간병을 위해 학업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공익요원으로 군에 입대했는데 제대하는 날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 1년 6개월간 고생하다 몸을 추스르고 나니 취업이 어려운 나이가 돼버렸다. 섬유근육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선 꾸준한 근육운동이 필요했기에 헬스 트레이너로 잠시 근무했지만 쉽지 않았다. “개인 트레이닝을 유도하려면 거짓말도 적당히 섞어 영업을 해야 하는데 성격상 그게 안 되더라고요. 어느 날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재활용품 정리하는 걸 봤는데 ‘저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아파트 내에서 움직이는 건데 설마 크게 몸쓸 일이 있을까, 새벽에는 내가 좋아하는 글도 쓸 수 있겠다 생각했죠.”

경비원 일이 몸보다 마음을 크게 다치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 했다. 교대 근무를 하면서 낮과 밤이 엉키고, 경비실 의자 말고는 변변히 쉴 만한 휴게공간도 없었다. 직원 수당을 가로채서 근무복·모자·펜 하나까지도 경비원들이 직접 사게 하는 관리소장은 너무 뻔뻔했다. “군대도 아닌데 입주민들에게 경례를 하라고 시키길래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어요. 무엇보다 제일 힘든 건 입주민들이 쏟아내는 비속어와 폭력이었죠.”

새벽 2시 경비실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중학생을 아이의 아버지는 발로 짓밟으며 폭행했다. 술 냄새 풍기는 아버지를 말리자 폭력은 나를 향했다. 그 틈에 아이가 도망치자 아버지는 소리쳤다. “이 XX야,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없어졌잖아. 찾아내!” 112신고 끝에 경찰이 출동했고, 그때서야 알았다. 아버지의 직업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다.

500㎜ 페트병을 들고 나타난 할머니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이게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느그들은 우리한테 돈 받아쳐먹으면서 이런 것도 하나 못 봐?” “할머니 화 푸세요. 물병은 제가 바로 치울게요.” “그럼 네가 처리하지, 내가 해? 쓸모없는 경비원 주제에.”

딩동! 역시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 뭔데요?” “안녕하세요? 경비실에서 마스크 드리러 왔어요.” “코로나인데 집 앞까지 찾아오고 지X이야 지X은.” 그녀는 며칠 전에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 손에 쥔 치킨 잔해를 보며 말했다. “냄새나는데 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X이야 지X은.”

김완석 작가가 2017년부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는 위로의 문장들. [사진 인스타 캡처]
“저랑 같이 교대하는 형이 어느 날 입주민이 잠깐 경비실에 맡긴 택배를 모르고 반품시켰다가 뺨을 맞았어요. 경험 많은 경비원 형님이 그러더라고요. ‘다른 곳에서는 더해. 그나마 뺨 한 대면 여긴 양반이야’라고.”

김씨가 근무한 아파트의 입주민은 대부분 부유층, 지식인층에 속했다. 하지만 그들의 우아함은 가면일 뿐이었다. “층간 소음, 담배 연기 민원으로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가 와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욕을 하고 짜증을 내죠. 이미지 관리를 위해 문제 당사자에게는 함부로 못하고 그 화풀이를 우리 경비원들에게 하는 거예요. 인간적인 모멸감이 들지만 어쩔 수 없어요. 참을 수밖에.” 이런 날엔 김씨의 SNS엔 이런 글이 올라온다. “상황에 맞지 않는 분노는 진상이지만, 화를 내야 할 때 참으면 만만한 사람이 된다…편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쉬운 사람이 되고 만다.”

SNS에 쓴 글 모아 에세이 펴내

김완석 작가가 2017년부터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는 위로의 문장들. [사진 인스타 캡처]
“아파트 경비실을 찾는 이들이 다 무례한 건 아니에요. 항상 경비실 문을 열면서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아저씨, ‘손자 같아서 그래’라며 요구르트를 두고 가는 할머니도 있어요. 불같이 화를 냈지만 ‘내가 오해했다’며 정중히 사과하는 분도 있고요.”

김씨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위로가 되어준 것들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다”며 “작은 배려나 사소한 언어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SNS에 위로의 글을 한 문장씩 올리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존감이 떨어진 나를 위로하기 위해 느리게 걸어도 괜찮고, 뒤쳐져도 괜찮다 쓰기 시작했는데 댓글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죠. 하루의 끝에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생각날 때마다, 사람을 관찰하다 틈틈이 휴대폰에 메모해둔 생각을 매일 SNS에 올렸다. 요즘 유행하는 ‘글스타그램(이미지 위주의 인스타그램에서 글로 소통한다는 의미)’처럼 배경화면도 직접 촬영하고, 아크릴 판에 마스킹테이프로 메모지를 붙이는 ‘소녀취향’ 장식도 한다.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 조정진씨의 책 『임계장 이야기』나, 2020년 입주민의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 끝에 투신자살한 60세 경비원의 이야기가 저도 처음엔 살면서 아주 간혹 벌어지는 뉴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6년부터 지난 5년간 경비원에 대한 폭언·폭행 신고 접수가 2369건이나 된다는 조사가 있어요. 실제로는 단언컨대 훨씬 높죠. 폭행당한 경비원 열 명 중 한 명이 신고를 할까 말까. 입주민을 신고하면 해고 대상 1순위로 지목되니까요.”

김씨도 2년 만에 경비원을 그만뒀다. 역시나 이후에 적당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고, 『위로가 되더라 남에게 건넸던 말을 나에게 건네면』 출판이 계기가 되면서 지금은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경비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경비원에게도 ‘감정’이란 이름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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