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모호한 상태로 사는 것에 대하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하지만
모호하게 살아가는 것도 삶 방식
16세기 초반에 기록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완성 동굴탐험’(Fragment of Speleology)에 따르면, 깜깜한 동굴을 처음 들어설 때면 누구나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그 느낌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어둠으로 인해 위축되는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어둠이 감추고 있는 것들을 캐내어 밝혀내고 싶은 갈망이다. 동굴은 어둠 속에 무엇이 잠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두렵게 하고, 나와 주변이 모호하게 섞인 혼돈의 상태이기 때문에 어서 명확하게 밝히고 싶게 한다.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주인공 명은(신민아 분)이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생면부지의 아버지를 만나러 언니와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아버지를 명은은 용서할 수가 없다. 똑똑한 그녀가 기대하는 가족이란 혈연으로 맺어진 친밀한 집단이어야 하며,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저마다의 역할을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가족이라고는 반쪽뿐인 혈연인 데다가 무식하고 전혀 마음이 통하지 않는 언니와 ‘이모’라고 부르는 엄마의 옛 친구뿐이다. 정식으로 ‘가족’이라고 분류된 집단의 질서 속에서 살고 싶은 명은에게,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어디에 무엇으로 분류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직 이것 또는 저것으로 확정되지 않은 채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의 범주 안에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사람들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주인공들이 그랬듯, 불안해한다. 스스로 혼란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에, 질서를 갈망하기도 한다.
식물은 식물끼리, 동물은 동물끼리 종, 속, 과, 목, 강, 문, 계 등으로 묶는 방식은 18세기 이래로 학문체계를 이루는 바탕이 되어 있다. 박물관이나 도서관 분류체계의 기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상작용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모호한 것들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해바라기, 사자, 루비, 8월은 어떨까? 루비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색이고, 8월의 태양은 강렬하며, 그때 태어난 아이의 별자리는 사자자리다. 해바라기는 한여름에 피며, 햇빛을 향해 얼굴을 내미는 꽃이다. 모두 뜨거운 속성을 가진 것들이니, 동종이 아니겠는가.
동종끼리는 서로 통하지만, 그 관계성에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수도 있다. 곁에 있지만 명칭이 없기에 서로 아무도 아닌 존재로 이해될 수도 있고, 불확실한 상태로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모호한 것들을 무질서한 미분류 상태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직 분류되지 않았을 뿐이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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