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여우도 미처 몰랐다..민중에게 버려지는 순간 몰락한다는 걸[윤비의 칼과 펜]
정치와 전쟁의 판세 읽기 달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냉정함
그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후 기세등등했던 귀족권력을 분쇄하기 위해 민주파를 교묘히 이용했다
탁월한 혜안과 지략 뒤에 감춘 냉혹함…시민들은 점점 자신들을 위협하는 무서운 독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결국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도편추방에 의해 쫓겨나 적국에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된다
어릴 적 아버지의 말처럼 ‘난파선이 된 영웅’…신의와 진실의 가치를 무시한 대가는 혹독했다
지난 글에 이어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치나 전쟁의 판세를 읽어내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실행력에서도 그는 일급이었다. 그런 인물이 겪은 삶의 부침 역시 드라마틱하기로는 그리스 역사에서 필적할 인물이 없다. 이 인물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정치가를 성공으로, 몰락으로 이끄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진솔함과 존중이라는 가치가 정치가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은 생각해보게 된다.
■영리한 여우
테미스토클레스의 개인적 삶이나 정치적 경력에 대해 고대인들이 남긴 기록을 읽은 사람들은 한 가지 뚜렷한 인상을 받는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목표를 정하면 집요했다. 무엇을 해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 명료하게 판단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 민주파의 편을 들기로 방향을 잡은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일 그가 귀족의 편에 섰다면 아테네 민주주의의 역사는 비극으로 쓰여야 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는 탁월했다.
왜 테미스토클레스가 귀족들이 아닌 민주파를 지원하는 쪽을 택했는지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그 자신 그리 내세울 만한 귀족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고 심지어 어머니 쪽을 따라 외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로부터 제대로 대접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을 가망성이 있다. 일반시민들의 편에 서는 것이 정치적 출세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한 정치가가 어떤 노선을 택하는가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개인의 야심도 작용한다. 정치가가 성직자이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유층에 속하는 정치가가 하층민의 편에 설 수도 있다. 그런 정치가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사람도 많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모두 위선자는 아니다. 재산이나 생활수준만을 본다면 역사의 많은 개혁가는 ‘민중’이라기보다는 지배 엘리트에 가까웠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뛰어난 판단력과 냉철함은 살라미스에서 빛이 났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라이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그리스의 연합육군을 격파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육지에서 승부를 걸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그는 살라미스의 좁은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깨뜨리자고 제안했다. 동료 아테네인들조차 그의 생각에 회의를 보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판단을 그리스인들이 따르도록 하기 위해 비상한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신탁을 날조했다(혹은 신탁의 해석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꾸며대었다).
그의 여우 같은 능력은 이 뒤에도 발휘된다. 우여곡절 끝에 살라미스에 모인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의 군세에 겁을 집어먹게 된다.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코린토스로 후퇴해 육군과 연합작전을 벌이자는 목소리가 그리스군 사이에서 높아졌다. 이를 알게 된 테미스토클레스는 직접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에게 그런 계획을 알려주고 그리스군의 퇴로를 끊으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빠져나갈 길을 막아 그리스 해군이 살라미스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이 이야기가 과연 진실일까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후에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아테네에서 쫓겨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들이 꾸며낸 것일 수도 있다. 나중에 이런저런 각색을 통해 테미스토클레스의 지략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탈바꿈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어쨌든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믿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에게 테미스토클레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짓말,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는 인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런 담대함과 여우의 자질을 귀족권력을 분쇄하는 데 기꺼이 사용했다.
페르시아를 살라미스에서 격파한 후 귀족들의 권력은 다시 상승일로에 있었다. 엄청난 전쟁비용이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한편 해군으로 공을 세운 하층민을 포함한 시민들도 자신들이 조국을 위해 기여한 만큼 뭔가를 돌려받기 원했다. 충돌이 뻔히 보였다.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은 귀족회의에 속했다고 한다. 성공한 지휘관이며 정치가였던 그의 경력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그는 귀족회의의 힘이 커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민주파의 우두머리 에피알테스에 힘을 실어주었다. 에피알테스는 적지 않은 수의 귀족들을 관직을 남용하거나 제대로 일을 못했다는 이유로 법정으로 끌어내어 유죄로 만든 인물이다.
궁극적으로 귀족회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에피알테스가 아니라 테미스토클레스였다. <아테네 국가>는 테미스토클레스가 귀족회의를 분쇄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에피알테스에게 귀족회의에서 그를 체포하려 한다고 귀띔한다. 동시에 그는 귀족회의에 지금 나라를 전복시킬 음모가 진행 중이라고 알려준다. 이어 테미스토클레스는 귀족대표들을 이끌고 에피알테스와 그 지지자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간다. 귀족들이 무리지어 나타난 것을 본 에피알테스 일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이야기대로 본인들이 제거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귀족회의를 500인 회의와 민회 앞에 고발하여 모든 권력을 박탈한다. 이 이야기에 일부 과장이 섞여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유럽 정치사에서 냉철함을 넘어 가장 냉혹한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여우의 몰락
왜 테미스토클레스가 에피알테스의 편을 들었을까? 그가 민주파에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야기했다. <아테네 국가>에 따르면 여기에 덧붙여 당시 그에게는 나라를 한 번 갈아엎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막 고발을 당해 곤욕을 치를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르시아 간의 관계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어느 하나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의 인기가 살라미스해전이 벌어지고 채 10년을 못 간 것은 확실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72년이나 471년쯤 도편추방법에 의해 아테네를 떠난다. 이 당시의 죄목이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스파르타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스파르타가 테미스토클레스를 증오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스파르타를 속이고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를 요새화하고 아리스테이데스와 힘을 합쳐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을 스파르타와 이간했다.
여하튼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이곳저곳을 떠돌다 종국에는 페르시아에 정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알현한 자리에서 자신이 지난 전쟁에서 페르시아군이 안전하게 물러날 수 있게 퇴로를 끊지 않았음을 내세웠다고 한다. 이것도 원래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반대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망이 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헬레스폰토스에 페르시아군이 건설해 놓은 부교를 끊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엄청난 수의 페르시아군이 퇴로 없이 그리스에 갇히면 결사적이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궁지에 몰린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적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도 끌어들여 페르시아 황제의 호의를 얻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페르시아에 정착한 이후 테미스토클레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마다 다르다. 일부는 그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총애를 받으며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그에 의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황제가 그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집트와 키프로스로 쳐들어온 그리스군을 치려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쩌면 두 번째 버전에는, 그래도 이 영웅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들 나라의 아들이었기를 바라는 그리스인들의 소망이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치가는 왜 추락하는가
테미스토클레스는 어느 날 그의 아버지와 해변가를 걷다가 버려진 난파선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정치가란 민중들에게 버려지면 저런 꼴이 되고 만다고 이야기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우려는 결국 사실이 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치적 추락에 스파르타의 손길이 미쳐 있음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이에게 추앙받던 전쟁영웅이 망명객의 신세로 전락한 것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결국 그의 몰락은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추방에 의해 쫓겨났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도편추방의 결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시민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일어나기 힘든 것이 도편추방이었다. 즉 테미스토클레스를 둘러싸고 그런 의심이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아 있는 기록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오만함을 그가 정치적으로 추락한 이유로 든다. 단지 과시욕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을 발아래 추종자쯤으로 취급하는 것은 성공한 정치가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맹목적인 일부를 빼면 대부분의 지지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한다. 그들에게 지지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그런 만큼 그들은 한 정치인에게 지지를 보내는 순간조차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 정치인이 자기 목적을 위해 신의나 정직 따위는 언제나 내던질 수 있는 무서운 여우라는 생각이 들 때 우려와 공포는 더욱 커진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사람들의 이런 우려와 공포를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섭고 차가운 인물인가를 여러 차례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해전에서 승리한 후 기쁨에 취해 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아테네 군선을 제외한 모든 다른 그리스군의 군선을 불태우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아테네가 그리스를 제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는 애국심과 공명심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몸서리치게 냉혹한 이야기를 들은 아테네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결코 테미스토클레스의 혜안과 지략에 대한 경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일은 드러내고 사람들을 기만한 것이다. 귀족회의의 힘을 꺾기 위해 꾸며낸 계책이 그런 경우이다.
결론은 이미 이야기한 대로 민주파에게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속아 넘어간 에피알테스나 그의 동료들로서 유쾌할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만큼 정치가에게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런 행동은 맹목적 지지자들조차 돌아서게 한다.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꼭두각시 취급을 받고 행복해할 사람은 별로 없다. 신의와 정직이라는 기본가치를 무시하는 대가는 빠르게 쌓이는 반대자이다.
전쟁의 기억과 승리의 기쁨은 빠르게 사라졌다. 민주파의 승리는 거의 확실해졌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냉철함과 냉혹함이 이제 아테네 시민들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독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인들이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테네에 머물 때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충분히 존경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날씨가 더우면 그늘을 위해 찾아들지만 날씨가 좋아지면 가지를 쳐버리는 플라타너스처럼 자신을 취급한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로서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를 경계하고 쳐낼 이유도 충분했다. 그는 무엇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묶어두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의와 진실이 갖는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이런 무지는 결국 몰락을 불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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