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은 밀쳐놓고 '군사 밀착'
양국 정상 통화..한·미·일 훈련도
강제동원·위안부 등 쟁점은 여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는 한·일관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일 정상은 지난달 21일 뉴욕 유엔총회를 계기로 3년여 만에 처음으로 대면한 데 이어 지난 6일에도 정상 간 전화통화를 가졌다. 양국 정상은 한·일 간 안보협력 필요성에 공감하고 ‘격의 없이 수시로 소통’하기로 했다. 양국 정상이 이처럼 잇달아 접촉을 가진 것은 최근 한·일관계에서 이례적인 모습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최근 국내 발언에서도 한국에 대한 신중하고 긍정적인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7일 대통령실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기시다 총리와의 통화를 언급하면서 “한·일관계가 빠른 시일 내 과거같이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 기업, 국민 교류가 원활해지면 양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제동원 배상 문제 등 갈등 현안을 묻어둔 채 이뤄지는 한·일 안보협력이 자칫 양국 관계를 왜곡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이 한·일관계를 변화시키나
최근 나타나기 시작한 한·일관계의 변화에는 여러 가지 추동 요인이 있다. 가장 직접적인 것은 도발 수위가 급격히 높아진 북한의 행동이다. 북한은 핵 선제공격까지 포함하는 핵무력 정책 법제화 발표 이후 다양한 탄도미사일을 하루가 멀다 하고 발사하면서 긴장 수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지난 4일 북한이 5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열도를 통과하는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을 발사하자 일본은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노출돼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확장억제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도 같다. 북한의 위협 증대는 곧바로 한·일의 공동 대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과거 냉전시대 한·일이 안보 위협 요소 앞에서는 갈등을 수면 밑으로 내리고 협력했던 패턴이 재현된 것이다.
미국이 한·미·일 안보협력을 추동하는 것도 한·일을 군사적으로 다가서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조 바이든 미국 정부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는 데 가장 필수적 요소로 한·미·일 군사훈련 확대·정례화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최근 독도 인근 공해에서 한·미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가 연합훈련을 재개한 것도 미국의 강력한 주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 북핵 대응 명분이지만
일본은 다른 전략적 의도도
양국 관계 진전 노력도 필요
■‘갈등 해결’과 ‘안보협력’ 투트랙 접근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안보협력이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에 반성하지 않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과 군사적으로 협력한다는 것은 국민 정서상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강제동원 배상 문제와 같은 갈등 현안을 먼저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한·일관계 진전을 통해 한·미·일 군사협력의 명분과 토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일관계가 의도했던 것처럼 빠르게 진전되지 않고 있다. 강제동원 문제에서 ‘성의 있는 호응’을 촉구했으나 일본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국내적으로도 피해자들을 설득하고 국민 여론을 납득시키는 일이 쉽지 않아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크게 늘어나자 정부는 갈등 현안 해결보다 한·일 안보협력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갈등 해결과 안보협력이 ‘의도하지 않은 투트랙 방식’으로 굴러가게 된 것이다.
■한·일 안보협력 지속 가능한가
한·일이 군사 문제에서 협력하는 것은 한반도 정세와 국제적 환경의 측면에서 한국에 필요하다. 하지만 한·일 군사협력은 자체적으로 역기능을 갖고 있다. 국민적 거부감은 물론 중국·북한의 반발을 불러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일 군사협력은 양국 간 갈등 요소들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한·일관계가 왜곡될 위험이 있다. 양국 간 갈등 해소를 우회해 곧바로 군사협력으로 가는 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끼고 항해를 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한·일, 한·미·일 협력에 대한 3자의 목표는 조금씩 다르다. 한국은 북핵 대응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미국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북핵 문제뿐 아니라 인도·태평양 전략에 활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적극 호응하면서 이를 군사대국화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물론 한·일의 안보협력이 해묵은 갈등 해소에 동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한·일관계 진전과 군사협력 확대를 정교하게 다뤄나가는 세련된 외교전략과 실행 능력이 필요하다. 특히 한·일 군사협력 확대는 어느 조건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분명한 선을 설정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 문제뿐 아니라 대미 외교와 대중 전략, 북핵 대응까지 모든 요소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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