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세 사람을 위한 기도

2022. 10. 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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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 영화배우

압구정 카페서 노래 알바한 유열

두 번째 만남서 친근하게 “선배”

작은 오해로 평생 친구된 송승환

낙천적인 성격에 난 늘 위로받아

겨울나그네 찍으며 만난 성기 兄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길

1. 유열을 처음 만난 것은 압구정동 길거리 상가 2층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였다.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하는 학생과 처음 들른 손님으로 만났는데, 알 만한 배우 여럿이 카페에 들어서자 마침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유열의 놀라는 표정은 오히려 순수했다. 같이 간 선배님들의 박수 속에 노래를 하게 되었고, 반주를 부탁하자 환한 얼굴로 기꺼이 기타를 쳐주던 유열. ‘참 선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첫인상은 어제 일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때 20대 초반이던 유열은 세상사에 호기심이 많은 방글방글한 얼굴이었다. 그 카페는 사람 하나 남기고 나에겐 이내 잊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유열과의 첫 만남이다. 1980년대 들어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볼링 열풍도 불어 볼링장마다 불야성을 이루던 당시 나도 무거운 볼링공 가방을 들고 다니며 새벽까지 치곤 했다.

어느 날 동호회 모임으로 아지트인 논현동 자이언트 볼링장에 들어서자 어떤 친구가 나를 보곤 반색하며 달려오더니 “선배님! 저 대학가요제 대상 받았어요” 한다. 며칠 못 본 선배에게 얘기하듯 친근하기 한량없는 모습이었다. 누구지? 아! 압구정동 카페! 두 번째 보는 유열의 그 친근함에 순간 무장해제가 되면서 “그래그래, 멋지다” 하고 마치 동네 형처럼 진심으로 축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서래마을에 살게 되면서 차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파스타도 먹고 서로 집에도 왕래하며 정말 동네 형처럼 살게 되었다. 유열의 친근함과 다정다감한 매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결혼이 늦어 내심 염려하던 차에 조용하고 참한 신부를 맞아 결혼도 했고, 아빠 닮은 아들도 얻었다.

2. 송승환과 처음 대면한 곳은 서울시청 앞에 있는 조선호텔 디스코텍에서였다. 그곳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엄청 잘나간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그날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러 간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DJ를 하던 송승환에게 따질 일이 있어서 처음으로 방문(?)한 자리였다. 드라마 ‘보통 사람들’ 녹화하던 날 정한용 선배가 나를 구석으로 끌더니 “야, 석우야! 승환이가 네 얘길 안 좋게 하더라” 한다. 송승환과 인사한 적은 없지만 평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인데, 전혀 근거 없는 말이어서 남의 얘기 같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드라마 캐스팅 과정에 관한 소문인데, 나라는 사람을 알면 할 수 없는 오해였다.

“녹화 끝나고 같이 가자. 오해는 얼른 풀어야 돼.” 만나게 되거든 오해 풀어라가 아니고, 일하는 데를 같이 가서? 옳지! 잘나가는 클럽에서 같이 한잔 먹고 싶은 선배의 속셈을 눈치채고는 젊은 기분에 “형! 엄하게 꾸짖으러 갑시다” 해서 그곳에 가게 되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조명과 강렬한 사운드 속 무대 위 송승환은 멋진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우리 자리로 온 송승환과 반갑게 악수하게 되면서 방문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날부터 평생 친구가 된 것이다.

송승환은 구김이 없다. 닥친 현안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지금 하는 고민은 올 크리스마스가 되면 기억나지도 않아’라며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살면서 깊이, 오래 생각하며 고민하는 나는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던지…. “지금 인터체인지 돌고 있는데 곧 고속도로에 올라설 거야.” 송승환은 일이 잘 안 풀리고 힘들 때면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난타’가 터지면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고, 동계올림픽 연출을 거치면서 또 다른 빛을 발했다. 내 친구의 인생은 세월 따라 잘 익어 간다.

3. 안성기 형은 영화 ‘겨울 나그네’ 찍을 때 곽지균 감독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동두천에서 촬영이 많았는데, 역삼동에서 출발해 우이동에 살던 형을 모시고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과 사람을 대하는 형의 인품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개봉 날짜가 잡히면 배우들은 홍보 때문에 더 자주 보게 된다. 그 영화는 작품의 여운뿐만 아니라, 우리 만남의 여운도 참 길었다.

“야, 똘만아 뭐하냐?” 작가 최인호 형님은 우리를 주로 골프연습장으로 불렀다. 자판기 커피 마시며 딱, 딱, 골프공 때리는 소리만 듣던 안성기 형과 나는 결국 함께 골프에 입문했고, 이후 하고많은 날 ‘안·강·최’가 함께 골프를 치게 되었다. 자기주장과 고집이 없다 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서열이 확실했기 때문에 ‘엉까는(엉기는) 일’은 감히 일어나지 않았다.

안성기 형과는 당구·스키·볼링 등 참으로 많은 스포츠를 같이 했다. 어느 날인가, 새벽 골프를 치고 오는 길에 “오후에 뭐 일 있어?” 하더니 집에 가서 바둑이나 한판 두자고 했다. 그 말에 “그럼 딱 몇 판만” 하고 들어갔는데, 웬걸! 그날 형수가 차려 주는 저녁을 먹고도 이어져서 밤 열두 시가 돼서야 집을 나왔으니, 난 참 눈치 없는 놈이다. ‘하루종일 석우 씨 하고만 시간 보내네….’ 혹시 불편할까 지나가는 말처럼 배려하는 형수를 보며 나는 웃기만 했지 새색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 안성기 형 부부는 신혼이었다. “지금 일 크리스마스가 되면 기억나지도 않는다”는 송승환의 말, 예외가 있었다. 주책을 떤 일은 이토록 오래 기억에 남는다.

요즘 나는 밤마다 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한다.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통화를 하고는 나도 마음이 아프다. 부디 치료 잘 받고 잘 이겨내서 내가 기억하는 처음 만난 그때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개선장군같이 우리 곁에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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