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 '직장 문제아'가 되는 것, 두려워 말라

입력 2022. 10. 7.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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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얕은 처마 밑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을 이유가 없겠지만 누군가 조직의 긍정적 발전을 위해서는 ‘자신이 악역이 되어 다 같이 사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스스로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용기만이 아니다. 이때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현실을 타개할 최적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냉정한 지혜도 필요하다.

▶비정상이 정상인 조직, 정상은 문제아?!

우리가 흔히 쓰는 ‘문제아, 돌아이, 고문관’ 등등의 말은 부정적인 의미이다. 이들이 같이 근무한다면, 그들은 조직의 지속과 발전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조직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직장에서 이런 말을 듣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거나, 동쪽으로 가라면 서쪽으로 가는 등 조직의 업무와 관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이들은 불필요한 존재에서 어쩌면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일단 어떤 이들을 문제아라고 부르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채로 입사한 직장인은 보통의 상식과 인격을 갖추고 있고 업무나 관계 역시 시간이 지나면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학습능력이 있다. 설마 미국의 수도를 LA라고 답하고, 혹은 고려의 태조는 ‘최수종’, 조선의 태조는 ‘김영철’이라고 답하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본 능력을 갖추고 가능성 있는 직장인이 문제가 되었을까. 어쩌면 조직이 그를 문제아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부서원이 뭉쳐 의도적으로 그를 바보로 만들고 고참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일만 시키거나, 혹은 아무런 일도 주지 않는 ‘의도적인 괴롭힘’의 결과인가? 이 또한 아니라면 그 문제아는 조직과 조직원의 모순이 만들어 낸 ‘괴물’일 수 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고착화된 직장’에서라면 문제아의 시선, 행동, 말 그리고 가치관이 정상일 수도 있다. ‘일 어렵게 만들지 말고 쉽게 가자’, ‘서로서로 좋게 처리하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번에 너만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별 문제 없어’ 등의 말들을 서로 주고받는, 비정상을 비정상으로 보지 않는 직장에서 낙인 찍힌 문제아들의 고군분투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두가 ‘예스를 외치고 동쪽만 바라볼 때, 노라고 말하며 서쪽을 바라보는 것’은 설사 그 행동이 옳더라도 조직원의 입장에서는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이 과정에서 조직원들은 그를 ‘옮은 문제아’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잠재된 도덕 의식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명분과 체면 때문일 수도 있고 업무 결과에 대한 책임 회피이기도 하다. 물론 문제아 역시 스스로 문제아가 되기로 결심을 하기까지 쉬운 과정은 아닐 것이다. 모두 오른쪽으로 갈 때 홀로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굳은 결기가 필요하다. 그 역시 굳이 얕은 처마 밑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을 이유가 없겠지만 누군가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이 악역이 돼 다 같이 사는 방법’을 선택한 결과이다.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스스로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용기만이 아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타개할 최적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냉정한 지혜도 필요한 것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부서에서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하지만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은 일들이 많다. 뻔히 실패가 보이는 무의미한 프로젝트, 성과를 낼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전시성 프로젝트, 반복되는 동료나 상사의 비리, 암묵적으로 액수를 맞추며 사적인 용도로 쓰는 각종 경비, 부장 간의 반목과 알력으로 타 부서의 프로젝트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행위, 다른 부서의 실적이 되느니 차라리 타 회사가 수주하는 것이 낫다는 부서 이기주의 등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건 아니다’를 외칠 수 있는 직장인은 흔치 않다. 옳지만 외롭고 괴로운 처지가 되는 것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다 같이 할 때 1/n로 줄어들어 가벼워진 책임감의 유혹이 크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선택은 사실 몇 가지 없다. 우선은 부서장에게 잘못된 점, 개선점 등을 상세히 보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서장이 묵살한다면 차선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기록’이다. 업무일지를 꼼꼼히 쓰고 결재 서류도 협의처와 단서조항 등을 첨부해 남겨야 한다. 물론 이는 면피용은 아니다. 하지만 권한과 책임에서 권한보다 더 큰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또 책임을 질 수 있는 리더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자질, 혹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무한이기주의가 아니다. 당연히 ‘의리를 저버리는 것 같다’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조직은 살아 움직일 수 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혹은 나섰지만 한 순간 혼자 문제아 소리를 듣는다면 그 조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면밀하게 체크하고 완벽하게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대안까지 마련하면 최상이다. 이것이 잘못된 것을 반복하고, 실패를 뻔히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진행되는 ‘부서의 붕괴’를 막는 방법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바로 타이밍이다. 배가 바다에 가라앉은 다음에 나 혼자 구명조끼를 입는 것은 비록 살아남아도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없다. 배의 작은 균열이 시작되는 순간, 모두를 혹은 최대한의 인원을 살릴 수 있을 때가 가장 좋다.

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신자, 고자질하는 놈, 스파이, 부원을 팔아먹은 놈 등의 공격을 경험하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독배도 마셔야 한다. 쉬운 길, 같이 가는 길에서는 새로운 경험, 경력을 쌓기는 어렵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서 능력은 더욱 숙성되는 것이다. 전체를 살리는 용기’를 내는 순간, 문제아가 되겠지만 그것은 분명 ‘긍정적 문제아, 조직을 살리는 문제아’이다.

▶갈등과 대결의 중재자를 자처하다

여기 무능한 리더를 대신해 악역을 담당하며 조직을 살린 ‘문제아’가 있다. 바로 조선 역대 군주 중 암군의 베스트3 안에 드는 인조를 보좌한 최명길이다. 그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오로지 백성의 안녕과 국가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는 ‘매국노, 청나라 앞잡이, 성리학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백성을 지키고 사직이 유지될 수 있다면 욕먹는 것이 아니라 목숨도 내놓겠다’는 결기로 악역을 자처했다.

치욕의 전쟁인 병자호란을 겪고 조선은 오랑캐 조공을 받던 국가에서 후금의 형제국으로, 그리고 청나라의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지배층의 무능력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성리학에 매몰된 그들은 현실을 외면한 채 후금과의 일전불사를 주장했지만 유일하게 전쟁을 피해야 백성과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바로 최명길이다. 그는 성리학자, 양명학자 그리고 외교관이면서 재상이었다. 그는 후금, 후에 청나라에게 잠시 고개를 숙이고 평화를 얻자는 주화파였다. 백성과 동료들에게 배반자란 비난을 받았지만 최명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패배가 뻔한 전쟁을 하는 것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왕조도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그는 누구도 선뜻 실행할 수 없었던 ‘모두를 살리는 원칙’과 ‘비난을 감수할 수 있는 소신’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최명길은 1586년에 태어났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유학자 집안이었다. 최명길은 여러 스승에게서 다양한 시각과 폭넓은 사고를 배우며 ‘한 가지 생각만이 정답이 아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방법은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최명길의 학문은 주자학에 머무르지 않고 양명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최명길은 양명학을 공부하면서 성리학만으로는 현실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판단했다.

최명길은 20세에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면서 사퇴했다. 당시 서인은 광해군을 몰아낼 반정을 모의했다. 김류, 이귀, 이괄, 김자점과 최명길이 합류했다. 1623년 4월, 최명길이 길일을 잡고 반정이 일어났다. 반정으로 인조가 등극하고 최명길은 정사공신 1등급과 완성군의 군호를 받았다.

인조 치세에서 최명길은 정치 세력 갈등의 중재자였다. 서인은 공을 다투며 양분되었다. 최명길은 ‘양쪽 주장이 옳은 점도 있고 틀린 점도 있으니 대결을 막기 위해 중용의 묘를 찾자’며 이익과 손실의 균형을 맞추는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해 갈등을 조종했다. 이윽고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인조는 도성을 비우고 도망가버리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모두 다 몸을 사릴 때 최명길은 앞장서 난국을 타개했다. 총독부사를 자원해 반란을 진압했다. 최명길은 책상물림 선비가 아닌 ‘행동파 재상’이었다.

최명길은 그 후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토지, 조세, 군역 등의 혁신안과 함께 당파에 상관없는 인재 등용, 공신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물론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최명길은 기득권의 공적이 되었다.

하지만 최명길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는 청렴하고 이권에 개입하거나 사리사욕을 부리지 않았다. 정적들은 최명길의 약점을 찾았지만 그를 공격할 명분을 얻지 못했다.

▶비난을 감내해내는 힘, 백성과 사직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범했다. 최명길은 강화를 주장하며 홀로 후금과 협상을 진행했다. 후금은 인조가 나설 것을 요구했다. 조정은 ‘오랑캐와 마주앉아 강화를 논의하는 것도 예의에 벗어난 것인데 어찌 임금이 오랑캐를 만난다는 것인가’라며 반대했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싸울 힘도 없고,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데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 이럴 때일수록 싸움을 늦추고,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과 후금과 형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사헌부, 사간원에서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 탄핵을 주장했다. 최명길은 ‘자칫 매도 당할 수 있다’는 충고도 대범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개인적인 비난보다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목숨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최명길을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임명하고 호조와 병조판서 직도 맡겼다. 후금은 조선에 명나라 공격을 위한 파병을 요구했다. 최명길은 “후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몇 년은 무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전쟁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사대부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사직과 백성을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유연한 외교를 주장했다. 이는 ‘협상으로 전쟁을 막고 국력을 회복시켜 전쟁에 대비하자’는 실리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청나라 황제가 되어 조선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정은 ‘명나라의 황제가 있는데 오랑캐가 황제를 칭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사신조차 받지 말자 주장했다. 최명길은 사신을 받자 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이후 최명길은 주장했다. “청나라에게 전쟁을 빌미를 주었다.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청나라 분위기를 파악하고 병력 동원 등을 점검해야 한다”고. 하지만 조정은 그를 ‘매국노, 의리를 저버린 주화론자’로 비난했다.

1636년 청의 군대가 압록강을 넘었다. 조정이 ‘싸우자’, ‘화의하자’를 논쟁하고 있을 때 청나라 기병대가 숭례문까지 들이닥쳤다. 최명길이 나섰다. “전하, 신이 청나라 장수를 만나겠습니다. 그가 듣지 않으면 신은 죽을 것이요, 청의 장수가 대답을 하면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때 남한산성으로 가십시오.” 최명길이 청나라 장수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에는 불과 한 달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식량밖에 없었다. 최명길은 주화론을 주장했다. 최명길은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았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최명길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청과의 화의에 나섰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백성과 종묘사직만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최명길의 신념이었다. 그는 굴욕과 수치심을 감내하며 청나라를 설득했다. 결국 화의가 결정되었다. 아무도 항복문서를 쓰지 않겠다고 하자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김상헌은 울면서 그 항복문서를 찢었다. 최명길은 찢어진 항복문서를 줍고는 다시 쓰며 “김상헌과 같이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이를 다시 붙이는 신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척화파의 주장은 ‘어차피 오랑캐에게 지는 것이나 조선이 망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 전쟁을 해야 한다’였다. 그들 역시 충신이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했다. 최명길은 전란 수습에 몰두했다. 그는 청나라로 가 백성들의 귀환과 척화파 대신들의 송환을 협의했다. 최명길은 800여 명의 백성과 같이 귀환했다. 그때 ‘환향녀 사건’이 불거졌다. 환향녀는 청에 끌려간 부녀자들을 비하하는 용어. 사대부들은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능욕을 당했으니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명길은 “이들은 조정의 잘못으로 욕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자의로 불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환향녀라는 비난도 금지해야 하며 이들과의 이혼은 절대 안 된다” 주장했다.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 진정한 용기

청나라는 또 파병을 요구했다. 최명길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과 파병은 명분이 다르다 판단했다. 최명길은 청나라 사신을 자원했다. 사지로 간 것이다. 최명길은 청 태종에게 말했다. “항복하는 것과 명을 공격하기 위한 파병은 다릅니다.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명과의 최소한의 의리를 지킬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후대에 면목이 설 것입니다.” 청 태종은 최명길을 가두었다가 그의 의로움에 감동해 풀어주었다. 최명길은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했다. 사신으로 가 조공 물량을 줄이고 조선인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하지만 최명길은 ‘삼전도의 굴욕’을 낳은 장본인이라는 탄핵을 받았다. 최명길은 영의정 직을 사퇴했다. 최명길은 약 2년여를 야인으로 지내며 공부에 매진했다.

최명길은 1642년 영의정에 복직했다. 다시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최명길은 청과의 대외 업무를 총괄하면서 명나라와도 비밀 소통을 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파트너는 장군 홍승주였다. 그런데 홍승주가 청에 항복하면서 최명길의 명나라 비밀 교섭을 청나라가 알게 된 것이다. 청 태종은 진노하여 소현세자를 인질로 잡았고 최명길을 심양으로 불러들였다. 조정은 발뺌을 하자 했지만 최명길은 “청나라가 증거를 갖고 있을 수 있다. 속였다가 발각되면 그 화가 주상까지 미치니 사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 나와 임경업 장군, 두 사람만 죽으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며 모든 책임을 졌다.

최명길은 북관에 2년간 감금되었다. 유배 중 최명길은 감금되어 있던 김상헌을 만났다.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도의를 저버린 매국노’라고 비난했고 최명길은 ‘명분만 좆는 꽉 막힌 사람’이라며 김상헌을 비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방법은 달라도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서로 인정했다. 김상헌은 “이제야 서로의 우정을 되찾으니 문득 백 년 의심이 풀리는구나”라고 마음을 표현했고 최명길은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돌이키기 어렵지만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간다오”라고 화답했다. 2년 뒤 최명길은 소현세자, 김상헌과 귀국했다.

인조는 이런 최명길을 깊이 신임했다. 하지만 최명길은 인조에게도 ‘아닌 것은 아니다’는 간언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645년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고 3년 상이 아닌 7일장을 지내자 최명길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인조에게 반박했다. 그는 또한 “인조가 세자비 강 씨도 용서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이처럼 최명길은 두려움이 앞서는 상황에서도, 상대가 임금이라도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647년 최명길은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이에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5일간 고기반찬을 거절했으며 제사를 지내고 최명길의 남은 가솔에게 3년간 녹봉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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