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공간 사람] 서울 아파트 떠난 부부의 인생 2막 "오감으로 느끼는 주택살이"

손효숙 2022. 10. 7.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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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경기 여주 왕대리에 위치한 서윤석·이은숙 부부의 집. 주변의 낮은 산을 닮은 박공지붕과 아담한 중정을 품은 목조주택이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경기도 여주 동쪽 효종대왕릉을 지척에 둔 한적한 마을. 검은색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목조주택이 병풍처럼 둘러싼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소박하면서도 묵직한 자태를 드러냈다. 대지 553㎡(약 167평), 연면적 110㎡(약 33평)의 이 단층집은 은퇴한 노부부가 두 번째 인생을 관조하는 집이다.

집뿐만 아니라, 땅을 찾고 집을 올리는 과정 자체가 살아온 길과 살아갈 삶을 돌아보는 과정이었다. 직장과 자녀 교육 때문에 평생 서울의 아파트를 떠나지 못한 서윤석(63), 이은숙(62)씨 부부는 퇴직할 즈음 교외로 눈을 돌렸다. 시골에 오붓하게 살 수 있는 단출한 집 한 채 짓는 게 원이었던 부부는 은퇴를 수년 앞두고 전원 생활을 준비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텃밭을 일구고, 주말에는 서울에서 1시간 거리를 기준으로 여러 땅을 다녔다. 그렇게 4년을 돌아다닌 끝에 이 땅을 만났다. "주변의 풍경을 보고 '안온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연고가 전혀 없었지만 이런 곳이라면 새 보금자리로 삼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다 싶었죠."

집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 뒤에는 효종대왕릉이 자리한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운명처럼 집터를 만났지만 집짓기를 서두르지 않았다. 인생의 마지막 집을 짓는 게 오랜 소망이었던 아내 이씨는 꼼꼼히 시간을 들여 건축가를 수소문했다. 건축 서적 수십 권을 섭렵하며 어떤 집을 어떻게 지을지, 집에서 무엇을 하며 살지도 고민했다. 이씨는 "27평을 넘지 않는 소박한 디자인의 단층집, 바람이 잘 통하고 볕이 잘 드는 집, 눈과 마음이 시원한 집, 출가한 자녀들과 어린 손주들이 놀러와 지낼 수 있는 집 등 막연했던 집의 모습이 점점 분명하게 그려졌다"며 "어떤 집을 지을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떠올렸다.

거르고 거른 건축가 리스트를 쥐고 오랜 고민 끝에 부부가 찾은 이는 투닷건축사사무소의 조병규 소장이었다. 스스로 준비가 됐다 싶던 때, 부부는 조 소장을 만나 집과 삶에 대한 대화를 시작했다. 건축주와 수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소통한 기억은 여러 채의 주택 작업을 해온 베테랑 건축가에게도 낯선 경험으로 남았다고 했다. 조 소장은 "마치 연서를 주고받는 심정으로 메일을 교환했고, 집 짓는 사람으로서는 그 과정 자체가 특별한 경험이었다"며 "두 어르신이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편안하고 단단한 집을 만들자는 목표가 섰다"고 회상했다.

박공지붕에서 비어 있는 부분은 프레임을 설치해 하나의 사선으로 연결했다. 복층에서 연결된 테라스에서는 프레임을 통해 자연 풍경을 그림처럼 감상할 수 있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12평 중정과 5평 독채를 품은 집

중정을 둘러싼 'ㄷ'자 형태의 집에는 한옥의 처마 밑 공간과 툇마루 공간이 있다. 부부가 마당을 바라보며 앉아 사색할 수 있는 정서적 장소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건축주 부부의 주생활 공간인 주방과 거실. 박공지붕의 사선이 만든 높은 천장과 기둥의 변주가 공간에 개방감과 재미를 불어넣는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그런 집주인을 닮아서일까. 집은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한 외양을 갖추면서 속이 여물고 단단했다. 박공지붕 목조주택 내부는 건축주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곳곳이 알차게 꾸며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운데가 뻥 뚫린 지붕과 그 아래로 자리한 중정(中庭)이다. 30평이 채 되지 않은 집에 12평 마당을 들이고 수목 대신 돌을 깔아 공간을 비워 뒀다.

집은 포인트인 중정을 둘러싸고 '디귿(ㄷ)'자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ㄷ'자 형태로 집을 지으면 담을 따로 세우지 않아도 건물 외벽이 담장 역할을 해 공간을 경제적으로 쓸 수 있고, 내부 시선이 마당을 향해 트인 느낌을 준다. 대지가 협소한 도심의 한옥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다.

사방이 트인 넓은 땅에 중정이 있는 도시형 한옥 구조를 만든 데는 평생 도시 생활을 해온 부부를 위한 배려가 담겨 있다. 조 소장은 "'ㄷ'자 형태는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장치이고, 안마당과 처마 밑 툇마루는 내외 완충공간"이라며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환경에서 시골 생활에 천천히 젖어들 수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건축가의 의도는 적중했다. 부부는 특히 좋아하는 공간으로 안마당을, 가장 만족스러운 요소로 툇마루를 꼽았다. 외부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 마당에 오래 머물게 되고, 지나가는 이웃들도 부담 없이 들러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는 것이다. 서씨는 "바람 좋고 볕 좋은 날 처마 밑에 앉아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주택 살이의 즐거움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ㄷ'자 집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거실과 주방, 안방이 연결되는 '기역(ㄱ)'자 형태의 메인 공간과 별도 출입구가 있는 원룸이다. 주공간과 분리된 방은 아내 이씨가 특별히 주문했다. 5평의 작은 규모지만 미니 주방과 화장실을 갖춘, 집 속의 집이다. 이씨는 최소한의 가구만 들인 작은 공간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탁자와 방석을 옮겨 다니며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바닥에서 쉬고, 잠을 자요. 시작은 손님에게 내어 줄 사랑방이었지만 지금은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완벽한 휴식 공간이 됐죠."

집의 한편에 마련한 방은 화장실과 주방을 갖춰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주생활 공간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5평 방. 건축주는 살림집과 스테이 중간쯤에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여유와 휴식을 만끽한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집의 여백을 채운 부모의 마음

깊은 처마와 툇마루가 있는 중정은 가족들의 놀이터다. 지난 여름 건축주 부부의 손주들이 통로에 설치된 풀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이은숙씨 제공

또 하나 눈에 띄는 공간은 별채와 안채 사이에 있는 통로 공간이다. "필요에 따라 구조를 바꿀 수 있도록 여유 공간을 남겨 달라"는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의도된 디자인이다. 용적률(주거전용면적)이 반영돼 방 한 칸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부러 비워둔 것은 순전히 자녀 세대를 위해서다. 조 소장은 "노년의 집은 건강상태, 임종 등 예기치 못한 변수들로 인해 쓰임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건축주 부부도 그런 점을 고려하신 것 같다"며 "부모가 여생을 보낸 후 자녀 가족이 사용하게 될 상황을 대비해 공간을 비워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빈 여백은 본래 의도와 달리 당장 쓰임을 찾았다. 평소엔 부부가 탁구 등 취미 생활을 함께 하는 여가 공간이다가 자녀와 손주들이 왔을 땐 물놀이와 그릴 파티를 하는 가족 놀이터로 쓰인다. 조 소장은 "마당과 연결되면서도 외부와 통하는 동선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며 "바람길이 생겨 환기가 잘되고 비바람을 막는 공간에서 가족들이 부담 없이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지붕 속에 숨은 다락 역시 자녀들을 고려한 설계다. 부부가 생활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자녀 부부와 손주들이 왔을 때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건축가는 박공지붕의 높은 층고를 활용해 복층 구조의 다락을 만들어 대가족이 지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확보했다. 평소에 비어 있는 공간은 자녀들이 방문하면 숙박과 놀이를 책임지는 알파룸으로 변신한다.

이제 입주한 지 두 달 남짓된 부부는 집 문패에 '무위재'(無爲齋)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남편 서씨가 좋아하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시문에 담긴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툇마루에 앉아 어린 손주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이 집에서 억지로 뭘 하지도, 더 하지도 않고 살아가려고 해요. 무위자연의 아이들처럼요."

박공지붕의 높은 층고를 활용해 만든 다락. 부부의 책과 살림을 수납하는 공간이자 자녀 방문 시 침실로 쓰인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1층과 복층을 연결하는 계단실. 최진보 건축사진작가 제공

여주=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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