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공부자탄강일
혜화역을 매개로 지은 인연이 많다. 대학로에서 첫 데이트를 했고, 근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서울대병원에서 아들을 얻었다. 나중 아이에게 줄 선물로 제 태어난 날의 신문을 산 곳도 혜화역 가판대였다. 최근에는 정기검진 받으러 가끔 그 병원에 간다. 그러니 이런 상상까지도 그리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간 착착 진행되어온 내 생로병사의 과정(過程)도 여기에서 마침내 마무리되는 것일까. 이 세상을 빠져나갈 때 이 낯익은 지하철역을 이용하면 어떨까.
지난주 수요일 혜화역에서 또 내렸다. 이번에는 병원이 아니라 학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매년 9월28일에 봉행하는 공부자탄강일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한문 공부를 더듬더듬 시작한 뒤 이런 식으로라도 참여해서 유학의 정수를 한 방울이나마 얻어 마실 수 있을까, 조금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이다. 혹 팔일무를 직접 볼 수 있으리란 기대도 했다.
대학은 성균관이다. 정문 옆 큼직한 바위에 새겨진 1398 숫자 앞에서 누가 토를 달겠는가. 우람한 은행나무 또한 그저 시설이 좋은 대학이라고 함부로 보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성전, 명륜당, 존경각 등 근엄한 건물들이 있고, 그사이로 샛문들이 많았다. 좁은 문마다 ‘머리주의’라고 적혀 있다. 이 사자성어는 굳이 번역 안 해도 알겠다. 키 큰 당신, 이마가 부딪히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그뿐일까. 기와지붕 몇 개 건너 위압할 듯 덤벼드는 대형빌딩들 속에서 단지 나의 두개골만 조심하라는 말로 읽히지 않는 것이었다.
경향 각지의 유림에서 보낸 화환들이 늘어선 무대 위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스승과 제자들이 죽간을 들고 학문하는 모습을 표현한 창작무용이 좋았다. 팔일무를 응용한 춤을 돌계단에 앉아 즐기면서 틈틈이 하늘에서 공자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올해로 2573년. 육십 간지를 마흔세 바퀴만 뒤로 돌리면 만날 수 있는 그분이다. 개인적으로 <논어>에서 가장 마음이 에이는 장면이 있다. 성균관 같은 행단의 뜰에 공자가 서 있다가 지나가는 아들에게 묻는다. 시를 배웠느냐, 예를 배웠느냐. 이른바 ‘과정(過庭)의 가르침’이다. 아직요. 말끝을 흐리며 물러가는 아들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공자. 아버지로서의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서 명륜당 마당을 빠져나왔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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