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라인', 끝판왕 도시인가 초호화 감옥인가 [이규화의 지리각각]
탈석유 '네옴시티' 건설에 한국기업 긴요
사막에 길게 뻗은 기괴한 직육면체 도시
건설 떠나서 누가 폐쇄공간에 살려할까
거대 프로젝트보다 더 시급한 건 민주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다음달 한국에 온다. 그는 현재 세계인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엊그제는 산유국 모임인 OPEC+가 11월부터 원유 생산량을 하루 200만 배럴 감산하기로 한 결정을 주도했다. 지난 7월 사우디를 방문해 원유 증산을 요청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아직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 대통령의 뺨을 때린 겁없는 행보다.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에 오는 이유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강력한 전제군주가 된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달 27일 행정 수반인 총리까지 맡았다. 2017년 왕세자 자리를 거머쥔 뒤 여성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여러 개혁정책을 펴기도 했다. 반면 그는 2018년 10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자국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잔혹하게 암살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대통령이 리야드까지 가서 원유 증산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는 이번에 그 부탁을 확실히 걷어찬 것이다. 대신 감산으로 국제원유가격을 지탱해주며 러시아 편에 섰다. 미국은 자신의 의도에 따르지 않는 국가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반드시 앙갚음 한다. 다만 언제 어떤 형태일 지가 문제다.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에 오는 이유는 확대해서 보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국 등 서방의 보복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서방과 거리를 두고 친중, 친러 행보를 걸어왔다. 미국이 자국 내 셰일가스 혁명으로 중동산 원유에 대한 니즈가 줄어들면서 중동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안보적 관심을 거둬들이자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탈서방과 탈석유'다.
이번에 빈 살만 왕세자가 방한하는 목적은 탈석유 전략의 일환이다. 기후위기로 인해 에너지원으로서 석유는 소비가 줄어들 것이다. 또 언젠가는 고갈된다. 석유산업 외엔 산업이 전무한 사우디는 미래를 위해 생존전략을 짜야 했다. 그 대표적 대안이 미래 첨단도시 건설이다. 바로 '네옴시티' 프로젝트다. 철도·도로·항만·초고층빌딩 등 도시 인프라 건설이라면 '도'가 텄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며 문화,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솔루션을 다 갖춘 한국기업들을 프로젝트 파트너로 참여시키기 위해 오는 것이다.
◆찬란했던 바빌론을 재현하려는 네옴시티
네옴시티(새로운 미래도시라는 의미)는 2030년 완공 목표로 5000억 달러(650조원)을 들여 홍해의 시나이반도 옆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과 맞닿은 국경지역에 건설하려는 도시다. 면적이 2만6500㎢(서울의 44매)에 달한다. 네옴시티는 크게 세 가지 구역으로 나뉜다. 직선형 수직도시 '더 라인'(The Line), 첨단산업단지 '옥사곤', 대규모 친환경 관광단지 '트로제나'다.
네옴시티 건설은 친환경 첨단도시를 통해 세계 인재들을 모으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석유의존에서 탈피하겠다는 전략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자신의 치적(治績)을 위해 펼치는 거대 프로젝트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로봇, 신(新)제조 3D프린팅 등을 주도하는 거점이자 문화, 관광레저, 스포츠, 의료 분야에서 세계 트렌드를 주도하는 허브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사우디는 국부펀드 규모만 6200억 달러에 달하고 석유 달러가 넘쳐나므로 투자금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가치'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가 적지 않다. 특히 핵심 프로젝트인 더라인에 대해선 과연 건설이 가능할까, 가능하더라도 사우디가 말하는 것처럼 최상의 쾌적한 거주공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더 라인은 홍해 아카바만에서 내륙으로 170㎞를 뻗는 직선형 형태로 계획됐다. 높이 500m(롯데월드타워 555m)의 벽체 건물을 200m 간격을 두고 170㎞ 길이로 짓는다고 한다. 양 벽체 건물 안을 상하좌우 다중 레이어로 공간을 조성해 물, 수목, 동물들을 들이고 주거, 업무, 학습, 레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폭 200m, 높이 500m, 길이 170㎞의 거대한 직육면체 공간은 아무리 친환경으로 조성한다고 해도 폐쇄성을 벗어날 수 없다. 폐쇄공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문제들을 피하기 어렵다. 공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공간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폐쇄된 공간에서는 근본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표현과 집회 등 정치적 자유가 박탈된 사우디의 사회정치체제상 삶의 공간마저 폐쇄된 구역으로 몰아넣는 것은 가혹하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강력한 전제군주체제인 사우디가 거대한 '초호화 감옥'을 짓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을 사고 있다.
찬란했던 바빌론을 재현하려는 네옴시티와 더라인이 오히려 바빌론 쇠락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기원전 20세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에 건설된 바빌론은 거대한 지구라트와 바벨탑, 화려한 공중정원을 건설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데 힘을 낭비함으로써 외적의 침입에 쉽게 무너졌다. 네옴시티와 더라인도 사우디가 지금은 넘쳐나는 달러로 건설은 할 수 있다고 해도 유지가 과연 가능할 것이냐는 문제에 봉착한다.
◆민주화가 진정한 치적 돼야
사우디아라비아가 언론과 출판,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여성에 대한 억압적 사회제도를 완화하지 않는 한 더라인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 을씨년스러운 300m 높이의 거대한 '진리부' 청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등 서방을 등지고 중국, 러시아 등 권위주의 진영으로 기우는 듯한 행보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미국이 근년 들어 '미국우선주의'에 취해 동맹을 어렵게 하고 있지만, 권위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 가치가 지닌 정당성과 파워를 넘지 못한다. 사우디 현 왕가는 태생부터가 서방(영국)의 도움으로 어렵게 권력을 잡았다. 사우드가(家)의 내력은 100년도 채 안 됐고 현 국왕은 초대 국왕의 아들이다. 빈 살만 왕세자로 왕위가 승계되면 비로소 3대 세습이 되는 것이다.
글로벌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의 주장에 따르면 사우디는 쿠데타의 두려움 때문에 자국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기피한다고 한다. 공군은 파키스탄 용병을, 육군은 이집트 용병을 쓴다. 심지어 왕가의 잠재적 전복세력이 될 수 있는 지식인층을 두려워해 국민들에게 고학력 교육을 시키는 것을 꺼려 한다고 한다. 자이한은 "그 같은 허약한 정통성을 그동안 흥건한 석유달러로 산 미국의 후견역할이 보완해줬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이한의 주장에 의하면 빈 살만 왕세자가 미국 대통령과 정부, 의회를 화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사실 미국이 사우드가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숙적인 이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인구 규모나 국민의 애국심, 지정학적 유불리 측면에서 사우디는 이란에 비교될 수 없다.
사우디가 국가로서 번영하려면 탈석유를 위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더라인 같은 기괴한 1984식 '진리부' 건설에 매달릴 게 아니라 국민이 애국심을 갖도록 하는 방법이 바른 길이다. 그건 바로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규화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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