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대동강변 기적이 왜 없는지 압니까?" 故 김동길 교수의 '돌직구 발언'들

유석재 기자 2022. 10. 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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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8일 TV조선 뉴스쇼‘판’에 출연한 김동길 박사가 최희준 TV조선 앵커,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토론하고 있다./이명원 기자

분명 안철수와 정몽준의 눈시울은 붉게 젖어 있었습니다. 한때 정치인이었거나 한때 정치인이 아니었던 그 두 사람은 분명 지금까지 가식(假飾)의 표정을 보인 적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달랐습니다. 지난 5일 김동길(1928~2022) 연세대 명예교수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 김옥길기념관을 찾아 조문을 하고 떠나면서 이들은 애써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저를 포함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항상 뵐 때마다, 아무리 본인이 힘드셔도 유머와 따뜻함으로 맞아주셨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5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 기념관에 마련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빈소 조문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그 다음에 주목할 만한 말을 했습니다. “(지난 대선) 단일화 국면에서 ‘대의(大義)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계속 기억할 것’이란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것이 제게 힘이 됐습니다.” 어딘가 자기PR이 함유된 멘트임은 분명했지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안철수 후원회장을 맡고 있던 김동길 교수의 그 말이 단일화의 지렛대 중 하나가 됐다는, 다시 말해 윤석열 정부의 정권교체에 김동길 교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반인을 포함한 약 600명의 사람들이 이날 빈소를 찾았습니다. ‘나를 위해 병원에 장례식장을 만들지 말라’며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기로 했던 김 교수의 유언에 따라, 자택 마당에 20여 년 전 건립했던 김옥길기념관의 비좁은 1층 로비에 마련한 시신 없는 빈소였습니다. 큰 소리로 “선생님!”을 외치며 자신이 그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를 대화하듯 말하는 남성도 있었고, 실신에 가까운 자세로 옆 사람에게 매달리며 오열하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모두 일가친척이 아닌 일반인으로 보였습니다.

김옥길기념관을 포함한 자택은 김동길 교수의 누나로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옥길(1921~1990) 전 문교부 장관과의 인연에 따라 이미 이화여대에 기증됐습니다. 김동길 교수의 장서는 상당 부분 국회도서관에 기증됐고, 남은 장서도 기증 절차를 밟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밖에 남은 재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한 지인이 전했습니다. 한마디로 모두 다 주고 떠난 것입니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5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 기념관'에 마련된 고(故)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태영호 SNS 갈무리) ⓒ 뉴스1

김동길 교수가 제자 중에서 생전 가장 아낀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김동건 전 KBS 아나운서는 이날 빈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님의 평생 사신 모습은 귀감(龜鑑)이라 할 만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오신 일생이었죠. 누가 그분보다 더 민주주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언제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진심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엄혹한 유신 시절에도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해지기 마련이죠. 하지만 박사님은 늘 약자에게 다정했으며 강자의 잘못 앞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치 ‘가요무대’를 진행하듯 차분하고 막힘 없는 톤이었습니다. 항상 그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온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핵심 멘트였습니다.

‘낭만논객’ 김동길 교수, 김동건 아나운서, 가수 조영남은 20대 관객 100명을 앞에 두고 고무된 듯 쉴새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3시간 넘는 녹화 동안 세 사람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4일 밤 김동길 교수가 별세할 무렵 신문사로 들어온 제보 덕에 저는 그 별세 소식을 가장 먼저 쓸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특종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은 특종이었습니다. 기사를 쓰면서도 의아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영영 돌아가시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거침없는 직언(直言)을 하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게~ 뭡니까?”를 서슴없이 외쳤던 김동길 교수의 최근 ‘말’ 몇 가지를 뽑아 보겠습니다.

그와 그의 누나인 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을 키워낸 사람은 어머니 방신근씨였습니다.

“한글만 겨우 깨친 어머니였어요. 시골(평안남도 맹산) 면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노다지를 찾겠다’며 나갔어요. 집 팔고, 논 팔고, 밭 팔고, 늘 밖을 돌면서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가족을 돌봤죠. 남의 집 빨래하고 삯바느질하고. 그러면서 누님을 공장에 보내지 않고 여학교에 보냈어요. ‘못살면서 계집애 공부시킨다’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 화를 안 내요. ‘뉘 집에선 돈을 쌓아놓고 공부시키나요?’ 이렇게 대꾸하셨지요. 그 딸이 이화여대를 나오고, 총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고. 이런 꿈은 한 여성(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온 겁니다.”(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1974년 유신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것에 대해 일각에선 ‘박정희에 대든 것이 아니냐’며 그를 좋지 않게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의 공과(功過)에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윤보선·김대중·함석헌·지학순·이태영·김동길씨 등‘반(反)유신 인사’들의 복권을 보도한 1980년 3월 1일자 조선일보.

“박정희가 잘못한 거 많아요. 그렇지만 건강보험 만든 것도, 경제를 이만큼 만든 것도 박정희 정권이에요. 박정희 땜에 감옥에도 살았지만, 한 번도 욕하지 않아요. 다 끝나면 잘한 걸 생각해야지, 그때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고. 그때 말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때 말 못 했으면 입 다물고 있으란 말이에요.”(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지원 혐의로 법정에서 15년형을 선고 받아 수감됐으나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습니다. 출감한 지 얼마 안 돼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에 몹시 비판적인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이 방한해 미 대사관에서 리셉션이 있었어요. 프레이저 의원이 ‘미국이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화를 돕겠는가?’고 묻자, 야당 정치인들이 ‘스팽크 힘(spank him·박정희 엉덩이를 걷어차달라)’이라고 답했어요. 내 차례가 됐을 때 ‘미국이 한국 민주화에 도울 게 없다. 민주화는 우리가 한다. 매도 우리가 맞고 감옥에도 가고 해야 달성된다’고 답변했어요.”(2015년 10월 조선일보 인터뷰)

1975년 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석방조치로 풀려난 김동길 교수가 안양교도소 앞에서 누님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가운데)과 함석헌(왼쪽), 계훈제씨 등에 둘러싸여 출감 소감을 말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1992년 대선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창당한 국민당에 합류하고, 그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했을 때의 비화를 얘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총선에서 국민당이 30석 이상 이기고 나니 주위에서 정 회장을 부추겼어요. ‘CNN이 조사했는데 회장님이 압도적으로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어느 날 정 회장이 찾아와 ‘결혼해서 가정을 가져라. 내가 200억원을 대주겠다’고 하는 걸 ‘이 나이에 결혼 안 한다’고 답했어요. 며칠 뒤 ‘김 교수는 젊으니 나중에 기회가 있다. 이번에는 내가 나간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그때 이런 내용을 공개했으면 나는 살지요.”(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1992년 12월 1일. 14대 대통령 선거기간 중 국민당의 김동길, 이주일 씨가 유세 현장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을 위기에 처하자 이런 칼럼을 썼습니다.

“인류의 역사의 어느 때에나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인데, 진실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 못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자가 공직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많은 백성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씨는 정말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2009년 4월 칼럼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

그 다음 달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투신자살했고, 그는 5공 시절 3김에게 물러나라고 권한 이른바 ‘낚시론’ 이후 또 다시 온갖 비난의 표적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비난의 이유는 뭔가요? 그 비난이 타당하다면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에 김동길 교수의 충언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일까요? 글쎄요. 저는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국면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기개 또는 배짱을 생각하면 저로서는 여전히 가늠이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김동길 교수가 2009년 6월 9일 서울 대신동 사무실에서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그는 얼마 뒤 그 글에 대해 ‘그렇다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살을 권장한 게 아닙니다. 의젓하게 구속되고 감옥에서 10년 살라면 10년 살고, 그런 인물이 되란 뜻이었어요. 그의 말 때문에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자살했고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자살했잖아요. 우리가 대학입시에 실패해 아파트에서 자살하는 학생들 얼마나 야단쳐요. 그런데 어른 중의 어른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준 게 뭡니까. 자살이라니요, 끝까지 살아야지요.”(2009년 6월 조선일보 인터뷰)

문재인 정부에서도 비판의 강도를 낮추는 일이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말도 했어요. ‘삼성을 해체해야 한다.’ 이 사람들이 뭐가 단단히 잘못된 사람들인가, 싶었어요. 자유민주주의 헌법하에서 대통령이 돼서 말이에요. 엉뚱한 정책을 만들어요. 삼성 해체는 이젠 어려우니까 안 하죠. ‘북과 남이 다 형제 아니냐?’ 그 말에 반대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북에서 왔으니까. 그렇지만 말이에요. 북의 체제를 전혀 비판 못 하잖아요.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을 맹공격해도 이쪽에선 한마디도 못 해. 중국에 대해서도 말 못 해요. 그쪽에선 뭘 달래면 줘야 되고. 사대주의(事大主義)지 뭡니까. 끽소리도 못 하고 말이야.”(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북한 체제에 대해 여전히 호의적인 일부의 시각에 대해선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써 가며 그 허구를 지적했습니다.

“북한에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요? 뭐 없을 수도 있죠. 나는 본래 북한 사람이니까 알아요. ‘야 저기에 환자 한 명 나오면 죽겠구나. 그냥 생기는 대로 없앨 거다. 환자가 없다고 해야 하니까…’ 그 생리도 모르고 말이죠. (중략)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입니다. 한강 변의 기적은 일어나는데 왜 대동강 변의 기적은 안 일어납니까? 자유가 없으니 그런 거 아니에요, 자유가.”(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2013년 3월 18일 TV조선 뉴스쇼 ‘판’의 스튜디오에 김동길 박사가 들어와 스태프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다. 종합편성채널 최고의 뉴스 시청률을 보인 ‘판’의 시청률은 그가 나오면 늘 급상승 반전됐다. /이명원 기자

우리 사회의 좌와 우를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통렬한 쓴소리도 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일 웃긴 게 보수, 진보라는 구분법입니다. 보수는 뭘 지켜서 보숩니까? 대학교수 중에 미국 유학 다녀와서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사람들이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고 맥아더 장군이 없었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고 해요.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교수들 보고 저는 ‘그때 통일됐으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유학은 고사하고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줘요.”(2009년 6월 조선일보 인터뷰)

광우병 사태의 촛불 시위 당시 ‘저 뒤에 분명 또 다른 정부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세월호 사태의 정치화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건 정말 ‘강철 멘탈’이라 할 만한 수위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계획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볼 때 순진한 젊은 사람들 머리에서 그런 생각이 안 나오거든. 어디에 지휘 본부가 있는 거지요. 세월호도 그래요. 일반 사람들이 그 참사를 그렇게 활용할 수 있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승리를 거뒀는데 이 정권은 배 한 척으로 승리를 거뒀다는 말이 나올 만큼이었지요. 그게 문재인 대통령 머리에서 나왔다고요? 그럴 리가요. 보라우, 문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 될 길이 열리자 곧 팽목항으로 갔어요. 방명록에 뭐라고 썼어요? ‘얘들아 고맙다.’ 고맙긴 죽은 게 뭐가 고마워요? 물속에서 죽은 어린 아이들한테 할 말입니까. 문제가 있는 거예요.”(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김동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가 2014년 1월 10일 오후 서울 송파구 지역사회교육회관에서 열린 홈빌더 운동 선포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래도 결국은 끌어안는 포용이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6·25 때) 이 근처 무허가 집에 살던 화가가 있었어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인데, 미처 피란을 못 갔어요. 살기 위해서, 밥 먹기 위해서 인민군을 도왔다고 해요. 그럼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끼리 피란 가서 미안하다’ 하고 껴안아줘야지. 부역을 했다고 쏴죽였어요.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건데. 대통령이 ‘서울 포기 안 하니까 안심하고 계십시오’ 해놓고. 그걸 믿고 피란 못 갔다가 고생했으면 돌아와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걸 부역자라고… 민족이 이래선 안 되지요. 링컨이 왜 위대해요. 남부 반란 때문에 지독히 고생하고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라고 말했잖아요. 이게 뭔가 있는 문명 아닌가요.”(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이 부분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김동길 교수의 전공은 철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역사학이었고, 재직한 학과는 연세대 사학과였으며,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링컨이었습니다.

청중을 사로잡는 강연의 비결에 대해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론 도저히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경지는 아닙니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좋은 말이 아니에요. 좋은 말은 상대방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상대의 마음을 읽느냐’고 묻자) 청중을 보면 얼굴에 나타나 있어요. 청중들 얼굴에 내 원고가 있는 거예요. 나는 따로 원고를 준비하는 대신 청중의 얼굴에 쓰인 원고를 읽어요. 그런 센스가 없어지면요? 나와서 얘기하는 거 그만둬야지요.”(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오랜 세월 동안 그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요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는 요소가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꾸준함과 익숙함입니다. 꾸준한 습관과 생활환경이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 같습니다. 한 집에 오래 사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1947년부터 살던 집에 아직도 살고 있으니 벌써 68년째네요. 멀리 여행을 가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됩니다.”(2015년 10월 헬스조선 인터뷰)

2020년 5월 월간조선 인터뷰 당시의 김동길 교수. /월간조선

평생 독신으로 산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본 적은 없어요. 여성을 떠나본 적은 없어요. 이렇게 사는 사람은 늘 동경 속에 살잖아요. 동경도 있고, 젊었을 때는 뭔가 많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노력으로 살았어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훼방을 놓는 일은 안 한다’는. 그런데 일흔이 넘으니 문제가 되지 않아. 공자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 되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사랑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들도 많이 가고. 이들이 내 가슴속에 살아 있는 거지.”(2013년 3월 조선일보 인터뷰)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더 깊이 있는 삶이 될 것이란 말도 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두라는 말도 하고 싶네요.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만큼 인생을 허무하게 보내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보세요. 살아 있는 시간이란 아름다운 인생의 마침표를 위해 준비하는 행복한 기간이라고 여기면 인생이 좀더 의미 깊어질 겁니다.”(2015년 10월 헬스조선 인터뷰)

5일 서울 서대문구 김옥길기념관에서 공개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유서.

김동길 박사가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해 시청률을 견인할 때 프로그램 앵커인 박은주 기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직구’다. 그러나 반드시 논거가 붙는다. 중국 고전과 영국의 역사, 그리고 미국 헌법까지. 감성은 팔딱팔딱 스무 살 청춘이고, 도저(到底)한 지식은 이백 살 현자다. 직설에 통찰이 더해지니, 철학이 된다. ‘너무 연로한 것은 아닌가, 준비는 착착 해오시려나, 한번 말씀을 시작하면 도저히 끊을 수가 없는데….’ 방송 한두 번 만에 앞의 두 걱정은 기우로 판명났다. 셋째는 여전한 숙제다. 혀끝의 말로써 지혜의 말에 대적할 수 없으니, 어쩔 것인가.”

TV조선 뉴스쇼 ‘판’에 출연한 김동길 박사가 최희준 TV조선 앵커, 박은주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토론하고 있다.

개그맨 최병서가 TV에서 콧수염을 달고 나비넥타이를 맨 채 ‘최동길’로 분장해 그를 흉내낸 것은 1991년의 일이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는 말이 국민적 유행어가 됐습니다. 그건 MBC ‘일요일 일요일밤에’였죠. 다른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냥 넘어갔을텐데 김동길 교수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사실 내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이건~~’ 정도에서 그치는데 많이 희화화했더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는 정말로 강연과 연설에서 “이게~ 뭡니까?”라는 말을 실제로 쓰게 됐습니다. 주로 권력자를 당당히 질타할 때였죠. 아예 1996년에는 SBS에서 최병서와 함께 출연하는 ‘동길 대 동길’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김동길’과 ‘최동길’의 대담이었죠.

이제 마지막 멘트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김동길 교수의 빈소가 차려졌던 지난 5일, 근처 식당 테라스에서 기사를 송고하고 있었는데 교수풍의 백발 신사 한 명이 빈소에서 나와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누군지 곧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지낸 문학평론가 유종호 전 이화여대 교수였습니다. 학자가 별세했는데 정작 다른 학자의 목소리를 좀처럼 못 담지 않았나? 얼른 뛰어가 말씀 한 마디를 청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가지 비판을 받으면서도 사회적인 기여 역시 많이 하신 분입니다. 재능이 아주 많고 기억력도 뛰어나신 분이었죠. 추종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렇게 기운이 좋으신 분이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가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최근 시집과 산문집을 잇따라 출간한 유종호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 19일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쓰던 말들이 없어지는 건 우리에게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했다. /오종찬 기자

그러고선 쓸쓸한 표정으로 이 한마디를 잠언처럼 덧붙였습니다.

“노년이라고 하는 것이... 내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저는, 특히 김동길 교수가 현실 정치에 깊이 개입하던 1990년대에, 그가 진정한 의미의 학자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제 어느 누가 그토록 중(重)한 자리에서, 올곧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좌파 세력이 교과서에서 빼려고 획책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묵직하고 유머러스하고 설득력 있게 설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당대의 그 어느 역사학자도 하지 못했던 일을 역사학자인 그는 한평생 해왔습니다. 94년에 걸친 그의 한평생이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였습니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커 보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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