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를 넘어 자신을 해부한 자전소설의 대가

김유태 2022. 10. 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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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에 佛 아니 에르노
외설과 불륜·임신중단 등
솔직한 자아 드러낸 소설
선정성 논란도 있었지만
'소외된 자'들의 방식으로
보편적 공감 획득 평가도
'단순한 열정' '레벤느망'
영화화된 소설 다시 눈길
서점가 에르노 특수 기대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19년 스페인 마요르카섬에 있는 호텔 정원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 [EPA = 연합뉴스]
'자기로부터 출발해 보편성에 가닿는 글쓰기.'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 세계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그의 작가적 신념에서 확인되듯이, 체험을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전혀 경계선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기를 벗겨 자신을 해부하듯, 그는 예리한 칼날 같은 문장으로 자전소설을 써 왔고, 한 여성이 보여준 사유의 깊이는 독자를 만나며 전례 없던 보편성을 획득했다.

1940년생인 에르노는 34세에 문단에 데뷔한 이후 문제적인 작가로 통해 왔다. 젊은 시절 만났던 남성과의 불륜, 당시 전면 불법이었던 임신 중단 수술 경험, 자신을 구속하는 어머니를 향한 살의, 죽어가는 가족 옆에서의 죽음 충동, 6세 때 사망한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소재는 그가 경험한 날것 그대로였다. 자신의 심부를 꺼내 보이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그는 논쟁적인 작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대한 작가로 불려왔다.

에르노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의 한 부분은 이러한 그의 문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1991년, 그의 나이 51세에 발표한 '단순한 열정'은 젊은 시절 그가 만난 대사관 직원과의 불륜과 그 이후의 격정을 담은 '위험한' 소설이다. 상대 남성은 에르노의 작가적 명성에 열광하지만 그는 가족이 있었고 둘은 결국 헤어진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한 여성'으로서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설 속 화자는 그가 내 몸에 치명적인 질병을 남겨뒀기를 희망한다. 정사 장면의 선정성을 넘어 소설 속 여러 문장은 큰 논란이었다. 가령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른다' 등의 문장이 그랬다.

강초롱 서울대 불문과 교수는 "아니 에르노는 엘리트주의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서 소상공인이었던 부모의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승화했으며, 제척당해 왔던 소외된 자들의 글쓰기 스타일과 소재를 엘리트적 문학에 끌어왔다"며 "작가 스스로 명명하듯 그의 글쓰기는 '밋밋한 글쓰기'로 일컬어진다. 화려함과 미사여구 없이 담담하지만 그들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평했다.

에르노의 노벨상 수상은 과거부터 예견된 바였다. 세계 출판사들은 에르노의 책을 앞다퉈 출간했고, 최근 '노벨상 유력 후보'라는 기대감 때문인지 한국에서도 최근 5곳 넘는 출판사들이 지난 3년간 15권의 에르노 책을 경쟁적으로 출간했다. 불운하고 이중적이었던 어린 시절을 담은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어머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담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단순한 열정'의 모티프가 됐던 소설 '탐닉' 등은 모두 그를 설명하는 작품들이다.

그의 소설은 자주 영화화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이 각색·연출한 '단순한 열정'은 2020년 칸영화제 진출작으로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개봉일이 더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영화 '레벤느망'의 원작도 에르노의 소설 '사건'이다. '레벤느망'은 우리나라 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작년 베니스영화제에서 1등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개봉해 호평을 받았다.

에르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여성 작가로는 역대 18번째다. 21세기 들어 여성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8명으로, 20세기 100년간 여성 작가 10명이 받은 점과 비교하면 여성 작가의 비중이 상당히 많아지고 있는 추세로 분석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올해까지 총 120명이다. 문학상뿐 아니라 타 노벨상까지 합치면 에르노의 노벨상 수상은 여성 기준 59번째다. 에르노도 올해 82세로 고령이긴 하지만 최고령 수상자는 2007년 88세 도리스 레싱이었다.

한편 에르노의 노벨상 수상이 현실화되면서 국내 서점가도 '노벨상 특수'를 누리게 됐다. 2020년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 2021년 탄자니아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작년과 재작년에는 수상작가의 책이 한국에 단 한 권도 번역 출간되지 않은 까닭에 국내 서점가에 찬바람이 분 바 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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