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인상→물가상승→임금인상 '나선효과'.. 늘 맞는 건 아니다

곽창렬 기자 2022. 10. 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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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인플레가 몰고온 '임금·물가 논쟁'

올해 상반기 물가상승률이 9%를 넘어선 영국에서는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의 말 한마디 때문에 난리가 났다. 근로자들이 높은 물가 때문에 살기 어렵다며 임금 인상을 요구하자 베일리 총재가 지난 8월 “모든 사람이 물가 상승과 임금 인상 국면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상황이 악화된다”며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 게 화근이 됐다. 이 말이 근로자들을 자극하며 임금 인상 요구에 기름을 부었다. 영국 철도해운노조(RMT)는 이달에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일 예정이고, 교사·의사·간호사들도 향후 파업 찬반 투표를 진행하기로 했다.

/일러스트=김영석

전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의 불길이 도무지 잡히지 않으면서 물가와 임금 간 연관성에 대한 논쟁도 달아오르고 있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대체로 ‘물가 상승이 임금 상승을 부르고,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을 일으킨다’는 판단에 임금 상승을 억제하려 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임금이 올라도 물가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나선처럼 오르는 임금과 물가

임금과 물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올라가는 현상을 경제학에서 ‘나선효과(spiral effect)’라고 한다. 물가가 오르면 근로자와 노동조합은 살기 어렵다며 기업에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근로자 요구대로 임금을 올리면 기업은 인건비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기 위해 상품 가격을 올리고, 그러면 물가는 더 오르게 된다. 물가 상승→임금 상승→물가 추가 상승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임금과 물가가 마치 소용돌이 모양의 곡선(나선)처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르는 모습에 빗대 나선효과라 불린다.

실제 이 같은 현상은 통계로 어느 정도 증명되기도 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1분기 임금은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7.6% 올랐고, 물가상승률은 5.4%를 기록했다”며 “1분기 임금이 동결됐다면 5.1%로 낮아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행도 보고서에서 “물가 상승률이 높은 시기에는 노동 비용이 더욱 쉽게 물가에 전가된다”며 “임금 상승이 물가를 추가로 밀어올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정부도 비슷한 인식이다. 올해 들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자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과도한 임금 인상은 고물가 상황을 심화할 수 있다”며 “잘나가는 기업들이 성과에 따른 보상을 주거나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명분으로 직원 임금을 올릴 경우 물가 안정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전부 물거품이 된다”고 말했다가 근로자들의 반발을 샀다.

◇나선효과 부정하는 사례도 많아

그러나 임금 인상이 물가를 밀어 올린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과거 기록을 보면 물가 상승이 임금 상승을 가져오는 것은 맞지만, 임금 상승이 반드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게 주된 논거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각국 중앙은행은 임금 상승이 물가를 밀어 올린다고 우려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들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도 ‘사라진 인플레이션 퍼즐’이라는 논문에서 “지난 20년 동안 미국 제조업체들이 상품 가격을 올린 것은 대체로 임금 상승과 관련 없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제조업체들이 상품 가격을 올리는 데 임금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전 세계 물가가 오르기 시작한 2021년이 돼서야 임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지난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 OECD 국가들의 임금은 6.3% 올랐는데, 이 기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2.53%였다. 반면 2011~2020년엔 임금이 8.7% 증가했는데, 이 기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1.86%였다. 임금이 많이 오른 2010년대에 물가가 더 안정적으로 유지된 셈이다. 대표적인 통화론자인 밀턴 프리드먼도 나선효과를 비판하면서 “물가 상승은 오직 화폐량이 증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임금 인상이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생산성·물가·경기 상황이 좌우

전문가들은 임금과 물가 간 관계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경기나 실업률 등 다른 변수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생산성’의 차이가 꼽힌다. 생산성이 높은 기업은 임금을 올리거나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하더라도 생산량이 증가해 수익을 유지할 수 있다. 이 경우 가격을 올릴 요인이 낮기 때문에 나선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반대로 생산성이 낮은 기업이 임금 인상을 하면,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보다 짊어져야 하는 비용이 더 커진다. 이 경우 기업은 물건 가격을 올려 손실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에선 나선효과가 맞지 않다는 주장이 꽤 나오는 반면, 우리나라는 나선효과가 비교적 잘 맞는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미국보다 훨씬 경직돼 있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기업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대 인플레이션도 중요한 변수다. 물가가 낮거나, 낮을 것이라는 심리가 널리 퍼져 있을 경우 임금이 올라도 별 영향을 주지 않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물가 상승의 요인이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물가가 지속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기업들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 물건 가격을 대체로 낮게 유지했다”며 “반대로 (현재처럼) 앞으로 물가가 올라갈 것이라는 심리가 퍼지면,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기 상황도 나선효과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오건영 신한은행 부부장은 “기업이 잘나갈 때는 직원 급여를 올려줘도 이익을 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조직이 비대해진 상황에서 경기가 나빠지면 이미 올린 임금이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이렇게 되면 상품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할 가능성도 커지는데, 현재 미국이 이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배선영 연세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나선효과 이론이 반드시 적용된다고 하면 물가와 임금은 한도 없이 올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물가를 정하는 기업이나 임금을 받아들이는 근로자가 서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 때문에 나선효과가 반드시 틀린 것도 아니지만 늘 맞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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