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에 아니 에르노.."체험하지 않은 허구는 쓰지 않아"

김종목·선명수 기자 2022. 10. 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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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
'나'라는 개인이 체험한 세계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선보여
금기들로 '칼 같은 글쓰기'
"진실 드러냄으로써 해방"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19년 3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촬영에 응하고 있다. 에르노는 2022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AP연합뉴스

스웨덴 한림원은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아니 에르노(82)를 선정했다고 6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한림원은 “개인 기억의 뿌리, 소원(疏遠), 집단 통제를 드러낸 용기와 임상적 예민함”을 선정 이유로 꼽았다.

에르노는 발표 직후 스웨덴 공영 방송 SVT에 “이 상은 너무 큰 영광이자 동시에 큰 책임감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릴본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소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이후 노르망디 이브토에서 자랐다. 1960년 루앙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했다. 졸업 뒤 중등학교 교사를 일하며 1971년 현대문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2000년까지 문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했고, 1984년 ‘자전적·전기적·사회학적 글’이라 명명된 작품의 시작점이 되는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제공

1991년 출간한 대표작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그리며 “임상적 해부에 버금가는 칼 같은 글쓰기에 가까운 철저하게 객관화된 시선”을 유지하며 사랑의 치명성과 열정을 진단했다. 인간 열정에 대한 예민한 분석을 담은 소설은 반(反) 감정 소설로 불린다. “이별과 외로움이라는 무익한 수난”을 겪은 모든 사람의 속내를 대변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 책이 나왔을 때 프랑스 르 몽드는 “단정하고, 간결하고, 차가운 문장들. 화해도, 양보도, 심리 분석도 없다. 정확한 단어들만이 있을 뿐이다. 정확함에 대한 열정. 완전무결한 단호함 속에서, 아니 에르노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고 평가했다. “보여주되 설명하지” 않는 글쓰기 스타일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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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품의 경향은 첫 장편인 <빈 옷장>부터 예견됐다. ‘나’라는 개인이 체험한 세계를 사회적 통념에 얽매이지 않은 날 것 그대로 선뵈는 방식이다. 그 어떤 가공도 은유도 없이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예리한 감각으로 관찰해온 그는 지난 50년간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온 주제들을 “칼로 도려내고 파헤치고 해부하듯이” 글로 써왔다. 가령 과거 프랑스에서 불법이던 자신의 임신 중단 경험을 쓴 <사건>(2000)을 비롯해 여성의 섹슈얼리티, 가부장제의 폭력,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결핍과 부르주아의 위선, 성적 억압과 차별 등 자신이 삶 속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모든 일을 문학으로 조형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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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프랑스 기성 문단은 금기를 드러낸 에르노의 작품이 그저 폭로로 점철된 ‘노출증’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르노는 “칼 같은 글쓰기”를 통해 은폐되거나 침묵당한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해 왔다.

단순한 열정

‘칼 같은 글쓰기’는 에르노가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 진행한 대담집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이 대담집에서 “나의 텍스트들이 겨냥하는 바를 지적해주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듯하다. … 나는 단지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개인적이고 일시적이며,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재검토되고 수정될 수 있는 몇몇 진실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기를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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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이브 자네는 “에르노의 엄격하고 대담한 글쓰기의 궤적을 열렬히 흠모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글쓰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실존의 고통과 즐거움과 복잡함을 적나라하게, 뼛속까지 파헤치는 데 주저 하지 않는다. 나는 은유 없는, ‘효과’를 추구하지 않는 그녀의 문장을 좋아한다. 그녀의 문장들은 부싯돌 같은 날카로움으로 살아 있는 살점을 생으로 도려내고 살갗을 벗겨낸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최근 들어 위와 같은 그녀의 성향이 한층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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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외 <부끄러움>(1997) <집착>(2002) <사진의 용도>(2005) 등이 있다. 2003년 작가 자신의 이름을 딴 ‘아니에르노상’이 제정됐고, 2008년 <세월들>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 자전 소설과 미발표 일기 등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로 생존 작가로는 처음으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됐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원작으로 한 영화 <레벤느망>의 한 장면 | 왓챠 제공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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