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지 않아요 느릴 뿐

한겨레 2022. 10. 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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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느지막이 일어나 도그 어질리티 게임을 시청했다.

눈빛 초롱한 개들이 반려인을 따라 잽싸게 장애물을 통과했고, 잠깐의 실수로 늦어지면 관객들은 탄식했다.

1등 개가 32초 만에 끝낸 경기를 윙키는 100초 동안 즐겼고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잠깐만요. 군대에선 뭘 빨리 끝낸다고 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뭐든지 하는 척했던 거고. 제가 지금 천천히 운동하는 건 귀찮고 재미없어서가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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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창]

서울 송파구 석촌호숫가 벚꽃터널 5㎞를 걷는 ‘벚꽃길 느림보 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이 벚꽃정취를 만끽하며 산책로를 걷고 있다. 연합뉴스

[삶의 창] 이명석 | 문화비평가

비 오는 날 느지막이 일어나 도그 어질리티 게임을 시청했다. 눈빛 초롱한 개들이 반려인을 따라 잽싸게 장애물을 통과했고, 잠깐의 실수로 늦어지면 관객들은 탄식했다. 그런데 ‘윙키’라는 이름의 비숑 프리제가 나오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윙키는 허들을 뛰어넘고 터널을 지나고 봉 사이를 지그재그로 지나는 등 모든 동작을 깔끔히 해냈다. 하지만 지나치게 느긋했다. 평균대에 올라가서는 두리번대며 환호를 기다리기도 했다. 1등 개가 32초 만에 끝낸 경기를 윙키는 100초 동안 즐겼고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언젠가 운동 강사가 내게 물었다. “혹시 회원님 별명 있지 않으세요?” “왜요?” “항상 보면요. 되게 처언처언히 움직이시네요.” 그러자 떠올랐다. “맞아요. 군대 고참들이 슬로비디오라고 불렀어요.”

강사는 완벽히 납득한 표정으로 돌아섰고 나의 변명은 마음속에서만 메아리쳤다. “잠깐만요. 군대에선 뭘 빨리 끝낸다고 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뭐든지 하는 척했던 거고. 제가 지금 천천히 운동하는 건 귀찮고 재미없어서가 아니라고요.”

세상에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있다. 보통은 잘하는 걸 좋아하고, 잘하니까 빨리 익힌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동료 작가들에 비해서 빨리 쓰는 편이다. 하지만 세상엔 ‘좋아하지만 못하는 것’도 있다. 내겐 춤이 그랬다. 열살 이상 어린 동기들과 초급반을 시작해 더욱 버거웠다. 다행히 내겐 좋아하지만 못했던 또 다른 경험이 있었다. 플라멩코 기타 선생님이 메트로놈을 늦추며 말했다. “먼저 한음 한음 천천히 정확히 치세요. 속도는 그다음에 높이고요.” 나는 춤도 그렇게 익히려 했지만 톡 쏘는 강사도 있었다. “왜 쉬고 계세요? 벌써 지치셨어요?”

내가 뭔가를 가르치는 처지가 되자 강사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수강생을 정해진 시간에 최소한의 수준까지 올려줘야 수업료의 가치를 했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런 경제성에 집착하지 않으면 다른 모습들도 보인다. 뭐든지 빨리 배우는 사람들은 쉽게 두각을 나타내지만 또 금세 싫증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천천히 배우면서도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를 ‘초급반의 지박령’이라 부르며 ‘제발 여기서 쫓아내지 마세요’ 애원하기도 했다.

느리게 즐기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느림보 자전거 대회라는 게 있다. 20m 정도 거리를 가능한 한 천천히, 그렇지만 발을 내리지 않고 가야 한다. 내가 빨리는 못 가도 느리게 가는 데는 또 재주가 있다. 거의 제자리에 선 채로 통통 튀며 균형을 잡고 페달을 뒤로 헛바퀴 돌리는 묘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정상적인 자전거는 적당한 속도를 내야만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다. 공부든 취미든 배움이 느리면 쉽게 지치고 흥미를 잃게 된다. 같이 시작한 사람들이 저 앞으로 달려나가다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의 외로움도 견디기 어렵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속도가 있다.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놀이에서는 그 폭이 넓게 허용돼야 한다. 얼마 전 성곽길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 많은 분들도 오시나요?” “아주 많아졌어요. 다들 재미있어하시고요. 다만 걸음이 느리고 쉽게 지쳐 일정이 더뎌지긴 하죠.” “젊은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하나요?” “대부분은 근처에서 잘 기다려주세요. 원래 일정이었다면 지나쳤을 걸 발견하시기도 하고요.” “아예 느린 걸음반을 열어도 좋겠네요.”

오픈런의 선착순이 유행하고 있다. 유명한 음식을 맛보려고 새벽부터 달려가 줄을 서고, 문을 열자마자 후다닥 먹고 또 다른 핫플레이스로 달려간다. 하지만 윙키 같은 사람들도 있다. 남들이야 어떻든 한가한 식당을 더 좋아하고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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