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자 칼럼] 가난하게 산다는 결심은 허영이 됐다

한겨레 2022. 10. 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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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냉장고가 들어왔다. 싱크대 앞에, 식탁 옆에 냉장고가 놓였다. 기뻤다. 음식을 넣어뒀다. 봄철 한때 설악산 줄기로부터 나오는 여러가지 산나물들을 삶아서 냉동했다. 냉동실이 작아서 몇봉투 넣지 못했다. 후회됐다. 좀 더 큰 것으로 살걸.

이경자 | 소설가

코로나가 세계적인 역병이며 치료제가 없고 전염력은 강하다고, 이런 병이 생긴 건 인간의 삶의 방식이 원인이란 분석이 언론에 보도될 때, 사망자가 넘쳐나 미처 관을 준비하지 못하고 구덩이에 파묻던 장면은 뉴욕에서 보내온 것. 존재 자체에 공포감을 느끼던 무렵, 고향인 강원도 양양에서 외삼촌의 부고가 왔다. 그분은 아들이 없다고 평생 자기 운명의 남루를 뒤집어쓰고 사신 외할머니의 양자였다. 이날 되기 전까지 외삼촌 댁에 외조부모님의 제사를 모시러 가끔 들른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닌 유치원과 초등학교와 성당과 성내리 11번지 집이 거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가까운 곳이다.

2019년 가을, 요즘 젊은이들에겐 살기 불편한 그 집을 마땅한 가격에 샀다. 집이 작아서 따로 은행에 빚지지 않아도 됐다. 절차에 맞춰 돈을 건네고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 입안에서 맛있는 사탕 같은 것이 돌돌 구르며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지나서 그 사탕이 행복감이라는 걸 알았다. 사탕이 알려준 행복감은 딱 하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갈 수 있게 됐다는 것, 서울을 떠나서 살 곳이 생겼다는 것. 더군다나 아주 작은 집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그곳에서 길지 않게 남은 생을 보내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로지 할 줄 아는 것, 하나, 아버지의 말에 따르자면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 것, 그 일을 더 하다가 세상과 작별하고 싶었다. 감히 언급하는 것조차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가 노래한 것처럼 ‘삶에 감사하며’ 세상과 작별하는 희망을 숨긴 채. 그것이 내 부끄러운 허영기임이 분명하지만 버려지지 않는 소망이다.

그러려면 내가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아야 했다. 그 방식을 그럴싸하게 정리하자면, 시골 구석까지 건네지던 구호물자를 더는 받지 않게 되고 ‘돈 세상’이 아직 시골까지 밀려오지 않았던 몇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을 담아 먹던 그릇을 씻은 물도 돼지 먹이가 되고 마당을 쓸어 나온 쓰레기, 부엌에서 나온 상한 야채, 마당가의 나무 잎사귀들도 두엄 더미에서 해를 지나 이른 봄철 논밭으로 나가던 때의 생활이다. 목욕탕이라는 것이 있는 줄 모르고 여름만 되면 남대천의 다리를 가운데 두고 위아래로 남자와 여자가 갈려서 땀을 씻고 때를 밀던 때. 남대천의 샛강에서 빨래하고 그 위에서 두 손으로 물을 퍼마시던 때. 학교에선 한꺼번에 산에 올라가 소나무의 송충이를 잡고 여름방학 숙제로 퇴비 한관, 혹은 잔디씨 한홉을 모아 가던 때….

부자가 뭔지 모르고 가난이 뭔지 모른 채 살았다. 배곯지 않고 헐벗지 않고 눈비 가려주는 집안에서 잠잘 수 있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왜냐면 자연에 죄를 짓지 않아야 해서.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 이해해서 개척하고 지배하고 내버리는 태도, 결국 벗어나고 싶은 오늘의 이 현실이어서. 인간 중심의 삶의 방식이 자연을 병들게 해서 병든 자연으로부터 인간이 불행해지는 악순환은 막아야 하니까.

그래서 결심했고 실천하려고 했다. 양양에 돌아가면 자연에 해로운 쓰레기를 만드는 생활은 물론 대기를 병들게 하는 온실가스도 만들지 말기로! 이런 결심이 행복감을 부추겼다. 뚜렷한 사계절과 24절기. 그 안에 닷새마다 변하는 기후들. 이것이 자연의 마음일 테니 거기에 맞춰 살자!

실천은 처음에 이랬다. 식탁 없이 신문을 깔고 밥을 먹었다. 자연히 허리를 구부리게 됐다. 아무래도 식탁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속초의 가구할인점에 가서 식탁을 샀다. 내 양심은 할인이라는 단어에 착 달라붙었다. 식탁을 놓으니 금방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1960년대 초, 엄마가 닳고 닳아 아름다움마저 깃들었던 나무 그릇들을 다 버리고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바꾼 뒤, 내 친구들에게까지 자랑하던 그 기분이 이랬을까? 식탁이 들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급한 것이 생겼다. 날이 더워지자 음식은 잘 상했다. 김치는 이내 쉬었다. 밥이고 반찬이고 하루에 한번 하느니 이틀에 한번 정도 해서 시간을 아끼는 편이 낫지 싶었다. 입안에서 오래도록 남아 있던 뿌듯하던 행복감이 주눅 들고 졸아들고 마침내 사라지려는 기미가 느껴졌다. 냉장고는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 하여튼 나는 냉장고를 사려고 가전제품 판매점으로 갔다. 주인에게 양양 사람이다, 다시 살러 왔다 등등 물어보지도 않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왜 냉장고를 사려고 하는지 슬픈 목소리로 설명하고 아주 작은 것을 찍었다. 주인은 내 선택을 의아해했다. 김치냉장고가 있느냐, 그게 없다면 냉장고라도 좀 커야 할 텐데 등등.

자연재해, 자연에 죄짓지 않는 것 등을 생각하며 2단짜리 작은 냉장고를 샀다. 집에 냉장고가 들어왔다. 싱크대 앞, 식탁 옆에 냉장고가 놓였다. 기뻤다. 음식을 넣어뒀다. 봄철 한때 설악산 줄기로부터 나오는 여러가지 산나물들을 삶아서 냉동했다. 냉동실이 작아서 몇봉투 넣지 못했다. 후회됐다. 좀 더 큰 것으로 살걸.

하숙생이라고 부르며 하숙비를 다달이 꼭꼭 챙겨 받는 딸이, 양양에 오면 심심해서 텔레비전이 꼭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나도 아주 싫지는 않았다. 보고 싶은 드라마도, 다큐도 있고 방탄소년단(BTS) 공연도 봐야 했다. 작은 텔레비전을 샀다. 거실 비스름한 좁은 공간 벽에 텔레비전이 붙었다. 좋았다. 아직 빨래는 손으로 했다. 큰 빨랫감은 서울로 실어 가서 해 오거나 딸이 와서 새로 생긴 아파트촌의 빨래방에 가서 해 왔다. 일일이 그렇게 하면서 살 수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를 넣기로 했다. 한겨울 지나면 큰 솥에 장작을 넣고 어른들의 무거운 겨울옷과 이불 홑청들을 이고 지고 남대천 샛강에 가서 온종일 빨고 삶고 말려서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은 1960년대에만 있었다. 나는 1964년 초겨울 양양을 떠나 서울로 왔다.

아무래도 세탁기가 있어야겠지? 내 말에, 당근이지 엄마! 하숙생이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엄마가 제정신이 들어간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곧 세탁기를 들였다. 용량이 가장 적은 것으로. 그러나 이불 하나 들어갈 것으로. 그러니 가장 적은 것은 아니었다. 편리했다. 식은 음식을 데워 먹을 수 있기에 꼭 필요하다며 후배가 전자레인지를 보내줬다. 집에서 쓰던 토스터도 가져왔다. 선풍기도 두대 샀다. 올여름, 호우와 폭염의 날들이 되풀이되던 어느 밤에 ‘에어컨’의 존재를 간절하게 생각해봤다. 창문형 에어컨이 새로 나왔다는데…. 다행히도 망설이는 동안 올해의 열대야는 사라졌다.

그러나 남아 있지 못한 것 하나, 나의 거만한 자만심과 허영기 가득한 희망은 북극의 빙하처럼 녹아 없어졌다. 가난하고 싶다고? 자연재해를 불러일으키는 문명의 이기들이 나를 무참하게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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