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트러스노믹스 실패가 남긴 교훈

신경립 기자 2022. 10. 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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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립 국제부장
감세안 헛발질에 글로벌 금융 발작
지속 가능한 재정의 중요성 재확인
독선·설익은 정책 위험성도 드러내
시장 신뢰 한번 깨지면 회복 쉽잖아
[서울경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전시 내각을 이끌던 윈스턴 처칠 총리는 긴급한 결제 서류에 ‘오늘 당장 실행하라(Action this day)’라고 적은 빨간 쪽지를 붙이고는 했다. 국가의 명운이 요동치던 시절, 그가 고안해 낸 이 짧고도 강렬한 메모는 위기에서 빛을 발한 처칠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작은 일화로 회자되고는 한다.

처칠의 시그니처와도 같았던 이 문구가 한 달 전 런던 다우닝가 10번가에 다시 등장했다. 보리스 존슨의 후임으로 보수당 내각을 이끌게 된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는 총리관저 앞 취임 연설에서 “폭풍우를 헤치고 경제를 재건하겠다”며 “오늘 당장 실행하고, 매일 실행하겠다(I will take action this day and action every day)”고 말했다.

그로부터 10여 일 뒤 트러스 총리는 450억 파운드(약 70조 원) 규모에 달하는 감세안에 자신의 빨간 쪽지를 붙였다. 결과는 대참사였다.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율과 인지세 인하, 법인세율 인상 철회 등 재원도 없는 트러스 정부의 대규모 감세 정책, 이른바 ‘트러스노믹스’는 영국의 신뢰도를 땅에 떨어뜨렸다. 파운드화 가치와 국채 가격은 곤두박질쳤고 궁지에 몰린 트러스 총리는 열흘 만에 고소득자 최고세율 인하를 백지화했다.

일부 정책 철회로 시장의 발작은 일단 가라앉았지만, 그 후유증은 크다. 경제 규모 세계 6위의 영국은 일련의 과정에서 신흥국 취급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고 영국 보수당은 다음 총선에서 정권 교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뜩이나 흔들리는 국제금융시장은 영국이라는 또 하나의 대형 뇌관의 존재를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봐야 한다.

그렇다고 트러스 총리의 참담한 헛발질에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책 실패는 글로벌 경제 불안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세계 각국에 생생한 교훈을 남겼다. 아직 확고한 경제정책 방향을 잡지 못하는 듯 보이는 우리 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지속 가능한 재정의 중요성이다. 포퓰리즘 감세로 인한 재정 붕괴를 수없이 목도해 온 국제경제계와 글로벌 시장은 트러스노믹스에 발작 수준의 반감을 드러냈다. 감세 자체보다 문제가 된 것은 이를 뒷받침할 재원의 부재와 취약한 영국 재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시장에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 100%를 넘을 정도로 취약한 영국 재정이 또다시 파운드화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둘째, 영국의 사태는 설익은 정책 모방의 위험성을 드러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추종자인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은 ‘감세를 통한 성장’이라는 대처의 경제정책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처 전 총리의 과감한 감세는 혹독한 공공지출 삭감과 부가가치세 인상 등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고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매파’적 재정 규율 하에 실행된 것이었다. 싱크탱크 뉴질랜드이니셔티브의 올리버 하트위치는 “트러스 총리와 쿼지 콰텡 재무장관이 정말로 대처 식 개혁을 모방하려 했다면 대처의 사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셋째, 오만과 독선은 왜곡된 정책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현지 언론들은 트러스 총리가 취임 후 경륜과 덕망이 높은 재무부 사무차관을 해임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에 귀를 닫은 채 감세 정책을 강행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지적한다. 조언자를 배제하고 내각과 당 내부의 논의조차 거치지 않은 채 내놓은 감세안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희박했다는 것이다.

뭇매를 맞은 트러스 총리는 5일 버밍엄에서 열린 보수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감세와 성장 전략을 강조하면서도 재정 강화에 힘쓰겠다고 약속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파운드화 가치는 다시 하락하고, 신용평가사 피치는 영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했다.

여기서 마지막 교훈. 한 번 무너진 시장의 신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신경립 기자 kls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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