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만원대 수영장 호텔 숙박이 100만원"..'호텔 성지' 싱가포르는 옛말[정호재의 아시아 르포③]

2022. 10. 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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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비싸진 싱가포르..나라가 안전자산
G2 패권 전쟁 후폭풍으로 중국 인재·자본 몰려
높은세금에도 부동산 가격 급등..금융시장서도 홍콩 대안으로

“항공편은 예전보다 싸졌는데, 호텔 가격이 가히 살인적이네요.”

[아시아경제 ]요즘 싱가포르에 입국한 한국인이라면 입을 모아 내뱉는 첫 마디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호텔가격 얘기다. 동남아시아 중심 국가이자 국제 항구인 싱가포르는 ‘호텔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다종다양한 숙박 인프라로 유명했다. 그런데 두 해 넘게 지속된 코로나 입국 제한이 풀리기 시작한 올 초부터 가격이 슬금슬금 올랐고, 하반기 이후는 고공행진을 넘어 기록적인 ‘하이킥’을 기록하고 있다.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 내 복합 쇼핑몰 ‘주얼창이’의 40m 높이 인공폭포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코로나 직전 하루 200SGD(싱달러) 남짓이던 4성급 호텔들의 가격이 순식간에 400싱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한국에서 출장온 직장인들은 숙박비 부담을 덜기 위해 성급을 한두 단계 낮추거나 조식을 빼는 경우가 늘었다. 100싱달러 이하 호텔을 찾기 어려워 실용적인 1인 여행객들은 5~7명이 방을 잘게 나눠 쓰는 캡슐형 호텔(하루 50싱달러)을 선호하는 형국이다.

명목 가격만 오른 게 아니다. 싱가포르 물가가 우리에게 훨씬 더 부담스러워진 이유는 환율 효과 탓도 크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당시 1싱달러는 800원 부근이었는데, 최근 환율은 1싱달러에 1000원에 근접했다. 불과 4년 만에 원화 가치가 25% 하락했다. 그러니까 과거 200싱달러 호텔이 16만원이었다면, 이제는 400싱달러, 즉 40만원을 넘는다.

5성급 리조트 호텔의 가격은 더더욱 부담스럽다. 싱가포르를 방문한 한국인들이 꼭 한번쯤 찾고 싶다는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 호텔이 대표적이다. 코로나 직전에는 한국돈 45만원 정도면 하룻밤 숙박이 가능해 옥상 위 수영장에서 멋진 셀카를 찍을 수 있었다면, 이제는 90만원을 넘어 100만원은 줘야 ‘싱가포르 로망’을 꿈꿔볼 수 있게 됐다.

◇ 싱가포르 고물가, 왜?

대도시의 호텔요금은 도시의 평균 부동산 가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싱가포르 부동산은 여전히 상승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곳에 오래 산 교민들께 귀동냥해 보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 공급망 파동과 미국의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연일 최고치를 경신 중이란다. 이 나라와 관련된 자산 전체가 안전 자산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부동산을 사려는 외국인에겐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게 싱가포르의 오래된 정책이다. 부동산 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면 노동자들이 의욕을 잃고 도시 경쟁력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에게는 부동산 매매가의 30%라는 징벌적 세금을 부가해 왔는데, 그럼에도 최근에는 돈을 싸들고 찾아오는 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 중심가에서 한참 벗어난 변두리 콘도마저도 20억원 이하 매물은 씨가 말랐고, 어느새 30억원대로 치고 올라갔다.

"그래도 국제도시인데 외국인 콘도가 그 정도면 아직 저평가 아닐까"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정을 알게 되면 엄두를 내기 쉽지 않다. 싱가포르는 토지의 국가 소유 원칙이 확고해 개개인은 고작 40~50년 건물 사용권만 가질 뿐이다. 재건축 이득을 얻기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각종 세금(취득세·양도세·보유세)과 다달이 내는 은행이자와 관리비마저도 한국인 기준으로 깜짝 놀랄 정도로 높다. 여기에 매매가의 30%를 외국인용 세금으로 무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홍콩처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수 없다고 정부는 자신해 왔지만 최근 시장 과열을 막지 못하고 있다.

임대시장 역시 마찬가지. 한국인이 밀집한 부킷티마의 경우 과거 월세 4000싱달러짜리 집은 단번에 6000싱달러로 빠르게 올랐다. 환율 효과까지 겹치다 보니 높아진 물가로 인해 싱가포르로 유학 오는 한국인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 중국발 인재와 자본

세계적 트렌드와 정반대로 싱가포르 부동산만 역주행하는 이유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코로나로 인근 조호바루, 인도네시아, 호주로 떠난 노년층이 강제로 싱가포르로 복귀해야 하는 등 주택 수요가 많이 늘어났다. 더욱 결정적인 요인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엘리트들 때문이다. 특히 중국계 인재와 자본의 싱가포르 선호도가 크게 높아진 것이다.

싱가포르국립대(NUS)에 가봤더니 캠퍼스 전체가 오랜만에 왁자지껄 생동감이 넘쳐난다. 이곳도 한국처럼 2년 만의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며 학생들이 다시금 학교로 몰려간 것이다. 캠퍼스를 누비는 상당히 많은 이들이 최근 중국과 홍콩에서 건너온 엘리트들이다. 대학마다 기숙사가 부족해 아우성이었다. 영어 우선 정책으로 유명한 싱가포르지만 이제는 중국어가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과 중국, 즉 주요2개국(G2)간 경쟁의 후폭풍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주요 대학들이 특히 민감한 공대와 생명공학 분야에서 중국 본토 인재를 뽑지 않는 분위기가 노골화됐기 때문이다. NUS 공대의 한국인 A 교수는 "중국에서 공대를 졸업한 엘리트 학생들이 예전처럼 미국과 영국에서 학생비자를 얻지 못하자 대거 영어로 교육받을 수 있는 싱가포르로 발길을 돌렸다"면서 "미·중 갈등이 지속되는 한, 당분간 싱가포르가 중국 학생들의 최선의 대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답했다.

◇자본도 유사한 처지

싱가포르는 최근 각종 지표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금융과 마이스(MICE, 기업회의·포상관광·국제회의·전시) 도시로 부상했다. 홍콩이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주춤하는 사이, 전 세계 자본과 물류가 빠르게 싱가포르로 집결한 것이다. 10월 초에는 세계 최대 자동차 경주 대회인 F1(포뮬러원) 그랑프리를 관람하기 위한 관광객 30만명으로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코로나 방역 정책을 유연하고 스마트하게 하면서 올해에만 600여개의 국제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가 주춤한 사이 싱가포르는 여전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특히 홍콩의 대안이 싱가포르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홍콩의 장점은 외환 및 금융시장이고 싱가포르는 선물과 현물 시장이었는데, 이제는 싱가포르가 홍콩의 장점까지 흡수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지난 22일 발표된 국제금융센터지수(GFCI) 평가에서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 1위에 올랐다. 뉴욕·런던에 이은 세계 3위다. 채용업체 로버트 월터스에 따르면 지난해 홍콩에서 700명 이상의 금융인력이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과 중국의 기업들과 부자들도 싱가포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서구 세계와 확고하게 연결되면서 확실한 자산 보호가 되는 안전지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것이다. 싱가포르는 금융자산에 대한 세금은 낮고, 부동산은 앞으로 가치 상승이 예상된다. 물론 압도적으로 자산 보호가 확실하고 나중에 돈을 빼기도 좋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홍콩이든, 중국이든 거의 모든 부호들은 해외 투자, 혹은 위험에 대한 헤징을 고려할 때 싱가포르를 최우선 순위에 두게 된 것이다. 코로나19가 끝나고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스위스’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어 보인다.

정호재 작가·고려대 아세안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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