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2000년대 초반 활약한 골밑의 파수꾼, 안드레 페리

이재승 2022. 10. 6. 10:1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9월호에 게재됐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2001 외국 선수 드래프트를 통해 국내 팬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는 단연 당시 대구 동양(현 캐롯)의 마르커스 힉스였다. 힉스는 1라운드 1순위로 동양의 품에 안긴 이후 김승현과 함께 대구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힉스 못지않게 활약한 이가 바로 안드레 페리였다. 1라운드 2순위로 원주 삼보의 부름을 받았던 그는 원주 삼보(현 DB)를 포함해 다른 세 개의 팀에서 뛰면서 프로농구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졌다.


프로 진출 이전
페리는 고교 시절 돋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문대학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빌커뮤니티칼리지로 진학했다. NJCAA의 커피빌커뮤니티칼리지 레드레이븐스에서 두 시즌을 뛴 그는 전학을 하기로 했다. 농구 명문인 앨러배마대학교에서 뛰기로 한 것. NCAA 앨러배마 크림슨타이드에서 두 시즌을 보내면서 대학을 마쳤다.
 

그가 전학을 갔을 당시에는 1991-1992 시즌이었다. 당시 앨러배마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로버트 오리와 라트렐 스프리웰이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또, 제이슨 케피가 신입생으로 가세했으며, 제임스 로빈슨이 2학년이었다.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기에 페리가 이전 학교에서처럼 많이 뛰긴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가끔씩 주전으로 출장하기도 하는 등 앨러배마에서 첫 시즌을 무난하게 치렀다. 

 

32경기에 나선 그는 이중 절반인 16경기를 주전으로 나서면서 입지를 다졌다. 경기당 20.9분을 소화하며 9.6점(필드골 성공률 : 58.9%, 3점슛 성공률 : 00.0%, 자유투 성공률 : 48.4%) 5.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큰 무대에서 첫 시즌을 무난하게 치렀다. 훗날 NBA를 누빈 선수들과 함께 했음에도 나름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
 

앨러배마는 주축들의 활약에 힘입어 사우스이스트컨퍼런스(SEC)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앨러배마는 10승 6패로 SEC 서부지구 3위에 올랐고, 이에 힘입어 전미 토너먼트에도 나섰다. 64강을 통과했고, 32강에도 안착했다. 그러나 경기의 무게가 남달랐던 만큼, 주전에 대한 의존이 심했다. 페리는 토너먼트 무대에서 뛰지 못했다.
 

이듬해인 1992-1993 시즌에도 출전시간 확보는 쉽지 않았다. 20경기에 뛴 그는 평균 22.3분 동안 8.9점(필드골 성공률 : 67.9%, 3점슛 성공률 : 00.0%, 자유투 성공률 : 57.8%) 6.1리바운드를 올렸다. 첫 시즌 대비 평균 득점은 줄었으나 시도 대비 슛 성공률이 늘면서 나름의 성과를 달성했다. 그러나 완연하게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했던 만큼, 미국에서 프로 무대 진출을 도모하긴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하부리그가 G-리그로 일원화되지 않았다. 페리는 국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
 

대학에서 코트를 누비기에 파워포워드로 적합했으나 NBA 진출을 도모하기에 한계가 많았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아쉬웠다. 운동 능력은 돋보였으나 세부적인 부분이 모자랐다. 자유투 성공률은 여전히 낮았으며, 슛거리 또한 짧았다. 대학 시절 기록에서도 드러나듯이 전형적인 블루칼라워커였다. 하물며 미국에서 뛰기에는 신체 조건이 그리 돋보이는 부분이 아니었다.

원주에서의 2001-2002 시즌: 30번
페리는 지난 2001년에 외국 선수 트라이아웃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나라에서 뛰던 그는 30대에 진입한 이후에 한국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1라운드 2순위라는 높은 순위로 삼보에 호명이 됐다. 삼보는 지난 2000-2001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에이스인 허재가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공백이 적지 않았다. 결국, 리그 7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대신, 높은 순번으로 페리를 데려가면서 기대를 모았다. 삼보는 오랜 만에 수준급 외국 선수와 함께 하게 됐기 때문.
 

하지만 다른 선수가 문제였다. 삼보는 2라운드에서 불렀던 해리 리브스를 교체하기로 했다. 시즌 초반까지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기는 했으나 안쪽에서 무게감이 떨어졌다. 페리가 고군분투했으나 다른 선수가 힘을 내지 못하면서 삼보도 좀처럼 위로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결국, 삼보는 외국 선수를 교체하기로 했으나, 더 큰 화를 불러왔다. 교체한 찰스 맨트는 뚜렷한 활약을 하지 못하고 네 경기 만에 짐을 싸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삼보는 연패를 피하지 못했다. 12월에 치른 9경기를 모두 지는 등 연패의 늪에서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페리의 경기력은 단연 돋보였다. 안양 SBS(현 KGC)와의 경기에서 페리는 이날 20점 23리바운드로 ‘20-20’을 달성했다. 5블록까지 더한 그는 이날 원맨쇼를 펼치며 팀을 9연패에서 구해냈다. 삼보는 맨트 이후 외국 선수 물색에 나섰고, 패트릭 은공바를 데려왔으나, 활약이 아주 저조했다. SBS전에 이어 서울 삼성과의 경기도 잡아내면서 실로 오랜 만에 연승을 질주했으나 더 이상의 상승세는 없었다. 그럼에도 페리는 당시 무려 12경기 연속 더블더블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는 훗날 20216-2017 시즌 로드 벤슨이 13경기 연속 기록을 만들기 전까지 구단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새롭게 데려온 외국 선수마저 부진했던 삼보는 끝내 18승 36패로 시즌을 마쳤다. 삼보는 신기성의 군 입대 공백과 허재(캐롯 사장)의 노쇠화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 다른 선수들도 크게 돋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페리가 주포로 나서면서 평균 38분 40초를 뛰며 경기마다 종횡무진 활약했다. 21.3점 13.7리바운드 2.4어시스트 1.9블록으로 가히 독보적인 활약을 했으나 팀은 플레이오프에 나서기에 모자랐다. 반면, 힉스가 이끄는 동양은 독야청청 활약했다. 김승현이라는 엄청난 단짝과 함께 리그를 폭격했다. 리그 1위로 시즌을 마쳤고, 여세를 몰아 결승에서 서장훈의 서울 SK를 최종전까지 치른 접전 끝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페리는 시즌 중에 열린 올스타전에서 다시금 진가를 보였다. 힉스 못지않은 엄청난 점프력과 왕성한 운동 능력을 자랑했던 그는 올스타전에서 정규시즌의 아쉬움을 달랬다. 이날 그는 무려 33점 16리바운드로 별 중의 별로 빛났다. 올스타전 MVP에 선정이 됐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하프타임에 열렸던 덩크 컨테스트에서도 시원한 슬램덩크를 선보인 그는 덩크 컨테스트 우승까지 차지했다. 지난 2002 올스타전에서 페리는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시즌 후 삼보는 2002 국내 선수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얻었고, 고민 없이 김주성을 불렀다. 김주성의 합류로 안쪽 전력이 탄탄해진 삼보는 페리와 함께 하지 않기로 했다. 김주성과 함께 높이를 확실하게 채울 수 있는 센터를 택했다. 페리가 뛰었다면 김주성과 공존이 쉽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 당시 김주성은 슛거리가 긴 빅맨이 아니었다. 이에 안쪽에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센터를 원했고, 고심 끝에 페리와 결별했다.

여수에서의 2002-2003 시즌: 21번
재계약에 실패한 페리는 다시금 한국에서 선수 생활 지속을 바랐다. 그러나 드래프트에서 전년도와 달리 낮은 순번으로 여수 코리아텐더(현 KT)에 지명이 됐다. 페리는 운동 능력이 돋보였으나 공격에서 한계가 적지 않았다. 개선이 어려웠던 자유투를 비롯해 공격 시 안쪽에 국한되는 부분이 많았다. 지난 2001-2002 시즌에 맹활약했고, 홀로 팀을 이끌기도 했으나 주포로서 아쉬움을 노출하기도 했다. 이에 높은 순번을 갖고 있는 구단들이 다른 선수를 뽑으면서 페리는 후순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코리아텐더가 그를 택하면서 뛸 수 있게 됐다.
 

코리아텐더는 당시 어려운 구단 여건으로 인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시즌 내내 에릭 이버츠와 전형수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모기업의 사정으로 뚜렷한 지원이 없었던 만큼, 시즌 후 전형수를 트레이드했다. 코리아텐더는 전형수를 보냈고 현금을 받았다. 그러나 코리아텐더는 정락영, 황진원이 자리하고 있었고, 여기에 페리가 가세하면서 안쪽을 단속할 수 있는 구성을 마쳤다.
 

비록 전형수를 보내면서 토종 선수의 구심점이 사라졌으나 코리아텐더는 막상 뚜껑이 열리자 다른 어느 구단보다 돋보였다. 센터가 없는 것이 약점이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이버츠가 공격, 페리가 수비를 책임졌고, 국내 선수들이 잘 어우러졌다. 연습장을 찾지 못해 지역을 전전했던 팀이 맞나 싶을 정도. 확실한 센터는 없었으나 움직이는 농구를 통해 높이를 상쇄했으며, 오히려 이를 빠른 기동력으로 발현하면서 시즌 초반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이버츠와 페리는 평균 40점+ 18리바운드+를 합작했고, 이버츠의 공격과 페리의 수비가 서로의 단점을 메워주면서 둘의 조합도 단연 돋보였다.
 

여기에 정락영과 황진원이 백코트에서 중심을 잡았다. 포워드들의 등장도 돋보였다. 변청운(성남초 코치), 진경석(KB 코치), 김기만(SK 코치)이 제 역할을 했다. 수비와 투지를 겸비한 이들은 공격에서 3점슛을 곁들이기도 했으며, 외국 선수와 백코트에 편중된 상대 수비를 흔드는데 일조했다. 이들이 있어 오히려 이버츠가 수비 부담을 덜 수 있었을 정도. 외국 선수와 토종 선수들이 한 데 어우러지면서 코리아텐더는 당대 강호를 잇따라 꺾는 엄청난 저력을 자랑했다.
 

코리아텐더는 시즌 첫 18경기에서 12승 6패의 호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계를 보였다. 시즌 중반까지 선전했던 코리아텐더는 리그 2위까지 주어지는 준결승 직행을 노릴 만도 했다. 하지만 시즌이 진행될수록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막판에 6연승을 이어가면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 7연패의 수렁에 빠지면서 순위 싸움에 치명타를 입었다. 결국, 코리아텐더는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쳤다.
 

플레이오프 첫 관문에서 서장훈의 삼성과 마주하게 됐다. 코리아텐더는 플레이오프에서도 맹공을 퍼부었다. 3전 2선승제의 시리즈에서 페리의 활약에 힘입어 코리아텐더를 삼성을 물리쳤다. 페리는 시리즈 평균 13.5리바운드 4블록으로 수비에서 발군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당시 삼성에는 서장훈, 스테판 브래포드, 아비 스토리까지 장신들이 두루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페리 홀로 수비에서 이들을 감당했다. 

 

1차전을 따낸 코리아텐더는 무난하게 2차전을 접수하며 준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동양을 상대로 맥없이 무너졌다. 1차전을 내주면서 불안한 출발을 했으나 페리가 2, 3차전에서 각각 31점, 29점씩 올리며 힘을 냈다. 그러나 주득점원인 이버츠가 부진하면서 힘을 쓰지 못했다.

서울에서의 2003-2004 시즌: 0번
페리는 이번에도 재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했던 추일승 감독(현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은 두 외국 선수와의 재계약을 우선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버츠가 돌연 계약을 거부했고, 페리는 부상을 이유로 교체가 됐다. 그러나 둘 다 외국 선수 트라이아웃에 나타나지 않았고, 페리는 사실상 팀에서 뛰길 원치 않았던 것으로 봐야 한다. 프로농구와 인연이 끝난 후, 그는 터키 2부리그에서 뛰었기 때문.
 

그러나 페리는 다시금 다른 구단의 관심을 받았다. 힉스가 부상을 당하면서 새로운 선수를 물색해야 했던 오리온스가 있었으며, 시즌 초중반에 삼성의 데릭 존슨이 부상을 당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오리온스가 먼저 페리 측에 접근했으나 페리의 원소속팀이 계약 중단을 원치 않았다. 결국, 삼성과 오리온스가 경쟁한 끝에 직전 시즌 순위가 낮았던 삼성이 웃었다. 삼성이 페리를 데려가면서 외국 선수 부상 공백을 최소화했다.
 

만약, 당시에 페리가 오리온스로 향했다면, 오리온스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김승현과 바비 레이저를 중심 전력으로 둔 가운데 페리가 들어갔다면 완전하진 않겠지만 힉스의 공백을 메울 만 했을 터. 그러나 오리온스는 보다 적극적으로 페리 영입을 시도하지 않았고, 끝내 그의 영입에 다가서지 못했다.
 

반면, 삼성은 시즌 직전에 지명했던 외국 선수가 모두 다친 가운데 급한 데로 존슨과 로데릭 하니발을 붙잡았다. 그러나 시즌 중에 존슨마저 다치면서 페리를 수혈했다. 그러나 하니발과 페리 모두 오프시즌을 완연하게 보내면서 호흡을 맞추지 못했던 만큼, 손발이 전반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존슨과 달리 수비와 기동력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페리의 합류는 긍정적이었다. 서장훈이 수비 부담을 덜게 하면서 공격에 좀 더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리는 농구를 추구하는 주희정과 서장훈의 공존이 원활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주희정이 시즌 중후반에 다치면서 전력 구성이 원활하지 않았다.
 

페리가 가세한 삼성은 리그 5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1라운드에서 앨버트 화이트가 이끄는 인천 전자랜드(현 한국가스공사)를 넘어서지 못했다. 페리가 화이트의 매치업으로 나섰으나 화이트의 공격 동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서장훈이 안쪽에서 분전했으나 백코트가 약한 전자랜드를 넘어서지 못했고, 삼성은 이번에도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해당 시즌을 끝으로 외국 선수 제도는 기존 드래프트에서 자유계약으로 바뀌었고, 유럽 무대를 누비는 선수들이 대거 가세했다. 페리도 30대 중반이 되면서 은퇴 시점을 조율하고 있었고, 그도 더는 국내 무대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사진_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Copyright © 바스켓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