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면 건강 잃어, 많이 움직여야' ..사회적관계 중시, 소모임 적극 참여

박현수 기자 입력 2022. 10. 6. 10:06 수정 2022. 10. 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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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에서 만난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이 산책 도중 포즈를 취했다. 윤 전 장관은 “10만 평의 인공호수를 포함해 약 30만 평의 호수공원이 집 앞마당”이라면서 “세계 어디를 가봐도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은 못 봤다”고 말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고양시 일산호수공원 내 팔각정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생활 철학으로 ‘절제’와 ‘양보’ 그리고 ‘관용’. 여기에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지금처럼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Youth)’을 소개하며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은 아니다. 꿈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면서 "이상과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100세 시대 명사의 건강법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

‘절제’ ‘양보’ ‘관용’ 건강비결

100만㎡ 호수공원이 산책코스

기계체조·합기도로 체력 단련

구순기념 문집 제작 작업 한창

글·사진 = 박현수 기자

“이프 유 레스트, 유 러스트(If you rest, you rust)”

쉬면 녹이 슬고 늙는다. 인간은 움직이지 않으면 쉽게 노화한다. 건강을 위해 많이 움직이라는 얘기다. 지난달 30일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에서 만난 윤형섭(90) 전 교육부 장관에게 건강 비결을 묻자 나온 대답이다.

윤 전 장관은 타고난 건강 체질이다. 지금도 특별히 아픈 곳이 없다.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많이 움직여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소년 시절 인왕산이 놀이터였다. 성북구 성북동으로 이사한 이후로는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청운초교와 경복중·고교까지 왕복 10㎞ 이상을 걷고 달리며 통학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기계체조에 미쳤을 정도로 빠졌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식사도 않고 운동에 매진했을 정도다.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이후 정법대 학생회장을 했을 정도로 학교생활에도 열심이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저녁엔 학원 강사로 영어와 함께 인성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연세대 명예교수, 건국대·호남대 총장, 단국대·명지대·건국대 석좌교수, 대한교육연합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등 한평생 학자와 교육 행정가로 지낸 단초가 됐다.

이 무렵 술과 담배를 배웠다. “너무 힘들어서 술·담배를 하면 피곤이 풀릴 것 같아서” 였다고 했다. 그러나 담배는 30년 전에 끊었고, 술도 3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육사 교관으로 있던 5년 6개월 동안은 합기도로 체력을 단련했다. 그는 “교육자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운동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한다.

윤 전 장관은 요즘 후학들이 만들고 있는 ‘윤형섭 박사 구순기념 문집’ 제작을 위해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간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영래 전 동덕여대 총장을 비롯해 12명의 제자가 작업하고 있다. 이들은 30년 전 회갑기념 문집에도 참여한 멤버들이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 변함이 없다. 그만큼 윤 전 장관의 인품과 제자 사랑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윤 전 장관은 이들과 지금까지 정기 모임을 가질 정도로 관계가 돈독하다. 그는 남들로부터 “제자 복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윤 전 장관은 고양시 일산에 선산이 있었다. 춘부장 호가 흰돌이다. 현재 일산 백석동에 흰돌마을이 있다. 그런 연유로 1994년 일산 장항동으로 이사를 왔다. 집 앞 도로 하나 사이로 약 33만㎡(10만 평)의 인공호수를 포함해 약 100만㎡ (30만 평)의 호수공원이 있다. 매일 아침저녁 산책 코스다. 그는 호수공원을 집 앞마당이라고 부른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은 못 봤다”고 할 정도로 일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관계를 활발하게 유지하는 것이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이다. 그런 점에서 윤 전 장관은 소모임이 1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지인들과 자주 만나 소통한다. 많이 걷기 위해 거의 매일 서울에 모임을 갈 때는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이것만으로도 대략 3000보는 걷는다고 한다. 하루 5000보 걷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다. 1만 보 걷기는 무리라고 했다. 최근 운전면허증도 새로 발급받았다. 오로지 부인의 운전기사를 하기 위해서다. “아내 손에 물 묻히는 것이 보기 싫어 없는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외식을 자주 한다”고 들려줬다. 메뉴도 부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정한다. 끔찍한 애처가다. 부인이 결혼 전부터 약한 체질인 데다 그동안 공직과 연구 활동을 하면서 가정에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배경이다.

그의 가훈은 여느 가훈과 달리 특별나다. 많이 길다. 일명 ‘일민 형섭 가훈 10개 조’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다. 보잘것없는 작은 일일지라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그럴수록 더욱 철저하고 정밀하게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잉 747이 엔진 나사못 하나로 추락하고 큰 둑이 쥐구멍으로 무너진다”면서 “작은 일이 모여 큰일이 되는 만큼 큰일이 작은 일로 망가진다”고 했다. 그래서 주위에서 그를 ‘완벽주의자’라고 한다.

그의 침대 머리에는 필기도구가 있다. 자다가도 무슨 아이디어나 시구가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한다. 그렇게 쓴 시가 여러 편이 된다. 구순기념 문집에도 몇 편이 수록될 예정이다. 그는 늦잠을 자서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보통 12시 넘어서 잠자리에 들고 아침 8시쯤 일어나면 침대 위에서 약 30분간 스트레칭을 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장로로 오랫동안 봉사 활동을 했고, 지금은 원로장로를 맡고 있다.

그는 평생 3가지를 생활철학으로 삼고 살았다. ‘절제’와 ‘양보’ 그리고 ‘관용’이다. 여기에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 지금처럼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로 보였다.

윤 전 장관은 독일 태생의 유명한 교육가이자 시인인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Youth)’을 평소 즐겨 애송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때로는 20대 청년보다 80대 노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은 아니다. 꿈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이상과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이 걸어온 길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1933년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를 나와 1953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이곳에서 석·박사학위까지 마쳤다. 모교 강사 시절이었던 1963년 ‘사상계’에 네 차례 5.16 군사독재체제에 대항하는 비판적인 글을 쓰면서 중앙정보부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중, 김명희 지도교수의 엄명으로 팬을 꺾고 학자의 외길을 걷게 됐다. 1966년부터 1991년까지 연세대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학생처장(1975~1979)을 시작으로 사회과학대학장(1981~1982). 행정대학원장(1982~1988) 등 학내에서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민주주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그는 이론가이자 자존심이 강한 지도자다. 권위주의 시절에는 사학의 전통과 명예를 살리고 사학의 권위를 지키는 일에 굽힘이 없었다. 결국 신군부 전두환 정권의 강압으로 학장직을 박탈당하고 국외로 추방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하는 올곧은 스승이라는 이미지는 학생들로 하여금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훈장(訓長)이 가업’이라고 말할 정도로 집안 식구 중 교육계 종사자가 23명이나 되어 ‘친척이 모이면 소교련(小敎聯)’이라고 불렸다. 서울시교육위원회 자문위원을 시작으로 대한교육연합회장을 거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까지 교권운동과 교육활동에 오랜 시간 몸담았고, 1990년 12월 제31대 문교부 장관이자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교육의 자율화’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교원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을 성취하는 한편 6차 교육과정 개정안 통과 등 정책 성과를 달성했다.

1992년 1월 22일 서울신학대학에서의 입시문제지 도난사건의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물러난 이후에도 합리적인 문제해결사로 종횡무진 활약해 서울신문사장(1992~1993), 건국대 총장 (1994~1998),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1997~1998) 대통령직속 반부패특별위원장(1999~2000), 호남대 총장(2001~2003)을 역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길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정치학회 회장, 건국대와 단국대, 명지대 석좌교수, 연세대와 단국대 이사를 거쳐 지금은 교육계 원로로서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장과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정치학회와 대한노인회, 연세대 총동문회 고문 등을 맡고 있다.

저서는 ‘한국 정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의 정치문화와 교육 어디로 갈 것인가-보람과 아쉬움의 세월’, ‘한국 정치론’, ‘한국 정치과정론’,‘정치와 교육’ 등이 있다.

윤 전 교육부 장관은 대한민국 교육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16회 경복동문대상(2007), 연세대 총동문회 자랑스런 연세인상(2001), 국민훈장 모란장(1999), 청조근정훈장(1992), 연세대창립기념 학술상(1988), 대한교련 교육특별공로표창(1983),국민훈장 동백장(1979), 육군사관학교 공로표창(1961)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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