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산] 1958년 설악..아이젠은 을지로 대장간, 텐트는 남대문

김근원 2022. 10. 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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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당시 최고 암벽등반가들이 주축이었던 슈타인만클럽과 동계 설악산 스키 등반에 나섰다.

설악산 입구까지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도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후 앞다투어 설악산 동계등반을 떠났다.

그러나 실제로 산을 오른 사람이 정말 겸손해졌는지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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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설악산 스키등반
대청봉 정상에 올라 피켈을 들고 환호하는 슈타인만클럽. 왼쪽부터 박찬웅, 최영식, 전담, 김승환. 1958년 1월

1957년 당시 최고 암벽등반가들이 주축이었던 슈타인만클럽과 동계 설악산 스키 등반에 나섰다. 모든 과정이 어려웠다. 아이젠은 을지로6가의 대장간에서 거절하는 것을 힘들게 설명하고 설득해서 겨우 만들었다. 동계용 텐트는 남대문시장에서 군용 윔퍼텐트를 운 좋게 구하고, 아내에게 부탁해 재봉틀로 내피를 만들었다. 설악산 입구까지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한국산악회 홍종인 회장이 군 수뇌부에 요청해 군용 트럭의 도움을 받았다. -중략

1958년 1월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갔다. 강원도경에서 보낸 트럭을 타고 인제까지 갔으나 폭설로 더 갈 수 없었다. 3일째가 되어서야 군에서 내준 트럭이 왔고, 발이 꽁꽁 어는 짐칸에 타고 겨우 속초에 닿았다. -중략

속초에서 산더미 같은 짐을 지고 비선대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비선대 부근에서 1캠프, 양폭 부근에서 2캠프를 쳤다. 눈과 얼음을 헤치고 올라야 했기에 행동이 많이 지체되었다. 2캠프에서는 설동을 파고 야영했는데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중략

정상을 오를 땐 스키가 아닌 아이젠과 피켈에 의했다. 경사가 너무 급해 안자일렌으로 서로를 묶고 아주 천천히 올랐다. 정상에 이르자 진눈깨비와 안개로 사방은 꽉 막혀 있었다. 주변 산세를 전혀 가늠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누군가 쌓아놓은 케른이 있어 정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져 온 페넌트에 사인을 하고 돌 틈에 붙들어 맸다. 그리고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천불동 스키등반이라는 전무후무한 등반기록을 남겼다. -중략

서울에 돌아와서는 서울대 강당에서 보고회를 가졌다.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들도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후 앞다투어 설악산 동계등반을 떠났다. 춘천에서 경찰국장이 건넨 첫 인사말이 늘 기억에 남는다.

"이 추운데 왜 설악산에 가십니까?"

그후에도 많은 사람에게 들었던 반복된 질문이었다. 늘 같은 대답으로 스스로를 추슬렀다. 산은 우리에게 오르기를 허용했고, 오른 만큼 더욱 겸허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 산을 오른 사람이 정말 겸손해졌는지는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사진가 김근원 선생의 유고 산악사진집 <산의 기억(열화당)>의 일부 사진을 발췌해 소개한다. 김근원 선생(1922~2000)이 남긴 30만 점의 사진 중에서

아들 김상훈씨가 386점을 엄선해 <산의 기억>에 담았다. 1950년대부터 담아낸 사진은 산악계의 소중한 유산이자 걸작이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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