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지언정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허형식 입력 2022. 10. 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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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창백한 말'

[허형식 기자]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도, 거사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도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도 마냥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그들이 겪었을 고뇌와 망설임의 만분의 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테러리스트라면 어떨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누군가를 죽이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은 태생부터 종류가 다른 사람일까? 그 신념이 누군가에겐 재앙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지하지 못하는가?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실행해야 하는 신념이란 무엇인가?

테러리스트이자 혁명가인 보리스 사빈코프의 자전적 소설 <창백한 말>을 읽으며, 그들은 왜 창백한 말(pale horse)을 타려 하는지 생각해 본다. <창백한 말>은 실제 1905년 당시 모스크바 총독이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왕자를 암살한 사빈코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된 소설이다. 제목인 '창백한 말(Pale horse)'은 성경에 등장하는 '세계를 멸망시킬 4인의 기사' 중 하나인 '죽음'이 타고 오는 창백한 말을 뜻한다.
  
▲ 창백한 말 표지 창백한 말 표지
ⓒ 빛소굴
 
1891년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된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반동주의 성향을 띠었고, 이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이자 조카인 니콜라이 2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훗날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니콜라이 2세 때 발생한 사건이니, 세르게이가 왜 러시아 혁명가들의 표적이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그를 생각할 때 나에게는 증오도 원한도 없다. 그러나 동정심도 없다. 나는 그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원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테러와 혁명을 위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 <창백한 말> 14p
 
테러리스트 단체의 리더인 조지가 모스크바에 도착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의 이번 목표는 모스크바 총독이다. 이를 위해 폭탄 제조 전문가 에르나, 인류를 사랑하기에 테러에 함께하는 바냐, 기득권 세력을 증오하는 표도르, 사회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참여한 하인리히가 조직에 합류해 테러를 모의한다.

주인공들을 소개하면서 언급했듯이 목표는 똑같지만, 그들이 목숨을 내걸게끔 행동을 추동하는 요인은 각기 다르다. 그 추동 요인이 없다면 그들은 절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다.

테러리스트란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시작하는 일이기에 우선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명분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통해 본인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일이지 스스로 답해야 한다.
 
나는 살인하지 않을 수 없었네. 만약 내 안에 사도使徒들의 깨끗하고 죄 없는 신앙이 있었다면 나는 테러에 참여하지 않았을 거야. 하나님이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칼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이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사랑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알지 못했고, 사랑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만 이해했네. - <창백한 말> 135p
 
작가인 사빈코프의 분신이라 분석되는 바냐는 그렇게 총독 암살을 성공하고 경찰에 잡힌다. 그는 사형을 당하기 전에 조지에게 마지막 편지를 건넨다. '타인을 위해 자기 영혼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에 살인도 할 수 있었다고 편지로 말한다. 이 대목에서 김훈 작가의 <하얼빈>이 떠올랐다. 거사 성공 후 심문을 하는 미조부치와 안중근 의사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 <하얼빈> 221p 

테러리스트의 길은 예수의 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바냐와 달리 안중근 의사는 세례받은 신앙인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으로 흔들렸고,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토를 죽이는 것의 목적이 살殺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동양평화)을 말하려는 것'(<하얼빈> 89p)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숨 바쳐 이루려 했던 인간의 신념이란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창백한 말>의 조지는 총독 암살 후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사랑했던 여자 옐레나의 남편을 우연히 마주친다. 서로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조지는 그에게 결투를 요청하고 그를 살해한다.

이제까지 명분 있는 살인만을 했던 그가 처음으로 그 자신을 위해 죽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묻는다. "어째서 테러를 위해 죽이는 것은 좋고, 조국을 위해서라면 필요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불가능한가? 누가 내게 대답할 것인가?"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결국 소련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보리스 사빈코프가 <창백한 말>에 조지라는 인물을 화자로 내세운 것 어떤 의미였을까? 작품 중 바냐의 말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것보다는 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전태일과 안중근을 돌아보니, 그들이 바친 것 자기 죽음이 아니라 온전한 삶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에 여전히 숭고함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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