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밖은 넘고 또 넘어야 할 장애물 도시[투명장벽의 도시①]

배문규 기자 2022. 10. 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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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허혁·김점지씨의 '탈시설' 2년..삶의 반경은 넓어졌지만 세상은 온통 걸림돌 투성이였다
허혁씨와 김점지씨가 지난달 6일 서울 구로구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함께 오르고 있다. 허씨는 장애인거주시설에서 30년을 지내다 2020년 여자친구인 김씨와 함께 장애인시설을 나와 보금자리를 꾸렸다. 지금은 공공일자리를 얻어 매일 출근한다. 그는 “시설에서 나온 뒤 삶의 반경이 한껏 넓어졌다”고 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지난 9월4일 서울 구로구 한 빌라의 거실 탁자에 초 두 개로 불을 밝힌 케이크가 놓였다. 웬만해선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허혁씨가 김점지씨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정신 연령에 맞췄네.” 두 개의 초를 보고 던진 허씨의 농담에 실내가 웃음으로 환해졌다. 이날은 허씨의 생일이자 ‘장애인 탈시설’ 2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허씨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뒤 장애인거주시설에서 30년을 살았다. 몸의 마비가 심해지면서 자립은 엄두도 내지 못하다 탈시설 지원주택 참관을 계기로 모험을 결심했다. 시설에서 만난 ‘점지 누나’ 김점지씨와 2020년 9월 자립해 서울 구로구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허씨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쉽지 않다. 힘겹게 내는 단어들을 주의 깊게 들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듣지 않는 자, 성대를 빼앗은 자가 있을 뿐이다.”(고병권, 묵묵) 한국 등록 장애인은 265만명(2021년)이다. 이 숫자가 체감되지 않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버스와 전철도 이용하기 어렵고, 노동 시장에선 배제된다. 중증장애인은 시설에 갇힌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던 장애인들이 삶의 자기결정권을 되찾는 ‘탈시설 운동’이 확산되면서 허씨도 2년 전 이 대열에 섰다.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먹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이지만 탈시설 이후 허씨의 삶의 반경은 한껏 넓어졌다. 지난 8월20일부터 한 달 동안 그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중증장애인도 일을 한다

허씨는 같은 빌라의 5층, 김씨는 3층에 산다. 따로 살지만 함께나 다름없다. 김씨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허씨의 집으로 올라와 하루 종일 곁을 지킨다. 지난 8월29일 아침 비로 출근길이 어수선했다. 오전 10시, 허씨의 활동지원사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허씨의 눈길은 PC 모니터 속 주식거래창에서 스마트폰으로 옮아갔다. 장애인콜택시(장콜) 애플리케이션(앱)의 대기 인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10시20~30분쯤 대기인원이 30명대일 때 부르면 1시간 뒤에는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1년여의 경험으로 얻은 노하우다.

장콜을 기다리며 아점(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콩나물무침, 깻잎지, 오이지, 멸치볶음, 두부부침까지 단촐한 식단이다. 세면을 마친 뒤 새치가 거슬렸는지 활동지원사에게 흑채를 뿌려달라고 했다. “반충이가 흰머리까지 있으면 꼴불견이지.” 11시 반쯤 장콜이 도착했다.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할 수 있도록 뒷좌석을 개조한 차량이다. 2m 남짓한 경사판이 내려와 휠체어가 오르면 안전벨트로 고정한다. 목적지는 서울 마장동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허씨와 김씨의 ‘일터’다.

시설을 나온 뒤에도 허씨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딱히 갈 곳도, 가보고 싶은 곳도 없었다. 반년쯤 지난 2021년 4월 지원주택 직원으로부터 일자리 신청 권유를 받았다. ‘이런 몸으로 일을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아무리 구박해도 그만둘 수 없다. 성동센터에 뼈를 묻겠다”고 할 정도가 됐다.

허혁씨는 서울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이제는 빠짐없이 출근하는 ‘성실 노동자’다. 지난 8월29일 오전 센터로 출근하기 위해 장애인콜택시에 탑승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성동센터에 비치된 8월 근무상황표에 허씨의 출근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다. 강윤중 기자

허씨의 일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2020년 서울시가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첨단’ 일자리다. 탈시설 중증장애인들이 삶의 기반을 만들고,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2014년 한국에 권고한 대로 장애인권리협약을 홍보하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이 업무다. 장애인의 권리를 말하고 권리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면 ‘권리를 생산한 노동’이 된다. 허씨는 평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주 20시간을 일한다.

중증장애인에게는 현실적으로도 이익이 된다. 생계급여로 58만3444원 받던 사람이 노동으로 총소득이 100만610원으로 늘어난다. 허씨는 공공일자리에 참가하면서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이 늘어난 것도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곽보연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처음에는 주저하더니 올해 재계약 면접에선 의지가 뚜렷했다”며 “노동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오후 1시가 지나면서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동센터는 20명을 두 반으로 나눠 운영한다. 한 주 일정을 점검하는 회의에 이어 2시부터는 음악시간이 이어졌다. 박지원 음악치료사의 안부 인사에 허씨가 “안 죽고 살아있습니다”라고 농을 던졌다. 수업에선 권익옹호 활동에 필요한 노래들을 연습한다. 가수 거북이의 ‘비행기’를 ‘휠체어 타고 가요’로 바꾼 노래다. “수많은 사람들 속을 지나쳐 날 보는 눈빛들에/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어 이럴 때 침착해 자연스럽게/ 장애인 이동권 빨리 보장해줘요. 이동권 기본권 평등권!”

수업 참여자들은 10월 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발표할 노래도 준비하고 있다. 허씨는 가수 안예은씨의 ‘문어의 꿈’을 골랐다. “나는 문어 꿈을 꾸는 문어 꿈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어/ 나는 문어 잠을 자는 문어 잠에 드는 순간 여행이 시작되는 거야/ 높은 산에 올라가면 나는 초록색 문어/ 장미 꽃밭 숨어들면 나는 빨간색 문어/ 횡단보도 건너가면 나는 줄무늬 문어/ 밤하늘을 날아가면 나는 오색 찬란한 문어가 되는 거야….” “역시 문어대가리가 좋아”라는 허씨의 너스레가 산통을 깼다.

시설에서의 삶이란

허씨는 19세 때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수원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중앙선을 침범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뇌수술까지 했다. 사고를 당한 지 100일 만에 깨어났다. 병원장은 ‘구사일생으로 살았다’고 했다. “내 생일이 9월4일입니다. 정말 구사(9·4)일생이죠.”

깨어나긴 했지만 후유증이 심각했다.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 일도, 힘이 빠져 주저앉는 일도 잦았다. 집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1991년 9월29일 경기 김포시 ‘향유의 집’*에 입소했다. 8년 뒤 이부일 이사장이 허씨를 발달장애인 시설인 누림홈으로 보냈다. 집에서 보내던 돈이 끊기자 내쫓은 것인데 정작 살아보니 편했다. 모두 지체장애인이라 도와줄 이가 없던 향유의집과 달리 누림홈의 지적장애인들은 담배나 커피를 사주면 서로 도와주려 했다.

점지 누나를 거기서 만났다. 1990년대 누림홈은 직원 2명이 30명을 맡았는데 분유통에 칫솔을 담아놓고 오는 순서대로 아무 칫솔이나 쓸 정도로 관리가 엉망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니 장애인들한테 설거지나 배식을 시켰고, 김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김씨는 결혼해 살다 집을 잃어버렸다. 아이들 먹여 살리려 동네 사람들과 미나리 캐러 다녔는데 어느 날 깜빡 버스에서 잠이 들었다가 눈떠 보니 처음 보는 동네였다. 글도, 길도 몰랐던 그는 경찰에서 부녀자보호소로 다시 장애인시설까지 오게 됐다.

김씨가 허씨 방 일을 하면서 감정이 싹텄다. “어느 날 점지 누나 앞니가 썩기 시작하더라고. 나중에 가족을 찾고 보니 유전병이었어요. 앞니가 없으면 보기가 안 좋잖아. 가족들이 보내준 돈 300만원으로 점지 누나 임플란트를 해줬죠.” 그때부터 둘은 본격적으로 사귀게 됐다.

허씨는 스스로를 ‘허반충’이라고 부른다. 밥만 축낸다는 뜻이다. 시설에선 TV를 보고 인터넷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날 방송고등학교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 고교 졸업장은 있어야겠다 싶어 2008년 서울 대방동 영등포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평소 인터넷 수업을 듣다가 한 달에 두 번 학교에 갔다. 장콜을 타고 왕복 43㎞ 거리를 다녔다. 개근상은 못 타고 정근상을 탔다. 성적이 괜찮아 대학 진학도 권유받았지만, 통학이 어려워 마음을 접었다.** 그 후 9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주식거래만 하며 지냈다. 지금도 주식은 주된 일과지만, 무료한 시간을 견뎌내는 방편이다. “나는 탈시설을 원하지 않았어요. 점점 몸에 힘이 빠져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나가서 산다는 상상을 할 수 없었어요. 자꾸 나가라고 하길래 입소할 때 돈 많이 냈는데 왜 나가라고 하느냐고, 그 돈 돌려달려고 했어요.”

그가 시설에 환멸을 느낀 계기는 2018년 누림홈에서 남이섬 단체 여행을 다녀온 뒤였다. 간호조무사한테 방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김에 베개 밑 TV 리모컨도 꺼내달라고 하니까 “더럽고 냄새나는 베개에 손대기 싫다”며 홱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나는 그 더러운 베개에 매일 코 박고 잔다”고 욕을 퍼부었다. 그동안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무시하던 사람들한테 쌓인 분노가 폭발했다. “퇴소하는 날 한마디 했어요. ‘원장님 감사합니다. 말로만 듣던 유전무죄 무전유죄 뼈저리게 느끼고 갑니다’라고요.”

시설은 거주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어려운 구조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2017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 실태조사)를 보면 입소기간 10년 이상이 58%, 한 방에 5명 넘게 거주하는 경우가 40%에 달했다. 다른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없고(38.3%), 자유롭게 목욕하기도 어렵다(34.8%). 정치적 의사표현, 종교의 자유는 물론 식사·간식의 선택, TV 시청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애초에 본인 의사와 무관한 비자발적 입소(67.9%)가 많지만 그럼에도 ‘가족들이 돌볼 여력이 없어서’(44.4%) 들어간다. 자발적 입소도 ‘가족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36.8%),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24.6%)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시설 거주인원은 2020년 현재도 3만명 가까이 된다.

삶의 결정권을 찾는 첫걸음

탈시설은 장애인이 삶의 자기결정권을 찾는 첫걸음이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국회에 제출한 장애인탈시설지원법안에서 탈시설은 “장애인이 생활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 통합되어 개인별 주택에서 자립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미국과 유럽에선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의 인권침해 실태가 환기되면서 1960년대부터 탈시설화 정책이 본격화됐다. 미국 장애운동을 이끈 주디스 휴먼은 <나는, 휴먼>에서 장애인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은 민주주의 약화로 이어진다고 했다. “사회 안에서 전체 집단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될 때 민주주의의 구조는 약화된다. 분리되다 보면 이해와 공감에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불의를 초래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부정하게 된다.”

‘도가니 사건’으로 알려진 2005년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으로 시설 장애인의 인권침해 실태가 폭로됐고, 2009년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시작된 투쟁으로 탈시설 운동이 본격화됐다. 2006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도 국내의 탈시설 운동에 힘을 실었다. 보건복지부도 지난해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을 내놨다.

탈시설 운동의 깃발은 세워졌지만 넘어야 할 벽 역시 만만치 않다. ‘독박 돌봄’에 고통받는 가족들은 생각이 다르다. 지난 6월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지원’ 조례 제정을 앞두고 전국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가 ‘탈시설 반대’ 집회를 열었다. 시설의 환경을 더 개선하고 다양화해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프리웰 이사장)는 “발달장애인은 탈시설 의사를 확인하기 어렵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입소할 때도 본인 의사는 확인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시설 대신 다른 서비스를 통해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설’ 아니면 ‘가족’이 책임지는 구조를 넘어 지역사회 지원체계를 두껍게 하자는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 역시 단순한 ‘이동권 투쟁’이 아니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 요구에 초점을 맞춘다. 중증장애인들의 일상·사회생활을 돕는 활동지원서비스를 늘리고, 시설을 나온 장애인들의 주거를 마련하고, 장애인 일자리 예산을 세우라는 요구다.

이사 갈 집 현관 턱에서부터 막혀…삶이 좀 더 평평해졌으면

허씨는 2020년 탈시설 간담회에 참석한 뒤 자립을 결심했다. 점지 누나의 지속적인 권유도 있었다. “옛날에는 장애인들 보기 싫다고 입소시켰는데 시설에 문제가 많고, 정부 정책도 탈시설로 바뀌고 있다고 했어요. 시설에서 죽을 순 없다, 인생 한 번인데 모험을 해보자 생각했죠.” 탈시설 결행일도 허씨의 생일에 맞췄다. 그런데 새집 현관에 턱이 있고 화장실도 여닫이문이라 휠체어를 타는 허씨와는 맞지 않았다. 집을 고치느라 실제 이사는 3주 뒤에 했다.

허씨가 월세 내고 사는 임대주택은 방이 3개나 되어 혼자 살기엔 넉넉하다. 하지만 생활공간은 여전히 서너 평 남짓한 방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는 시설에 있을 때부터 “제발 좀 외출하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침대, 책상, 컴퓨터, TV로 비좁은 방이 휑한 거실과 대조되어 답답하게 느껴졌다. 자립 생활은 잃어버린 취향을 되찾고 소소한 일상으로 집 안을 채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 혼자, 그리고 함께 산다
허혁씨는 지난달 1일 서울 을지로에서 열린 ‘Disability Pride’(장애인 자긍심) 행사에서 참가자들과 도로 위를 행진하고 있다. 이 행진은 ‘권익옹호 활동’으로 허씨의 노동이기도 하다. 강윤중 기자

9월1일 서울 을지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Disability Pride’(장애인 자긍심) 행진에 성동센터도 참가했다. 400여명이 노동청 앞에서 종로구 마로니에공원까지 행진을 하며 중증장애인고용촉진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현행 장애인고용촉진법으로도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을 위해 정부가 공공일자리를 발굴·지원하라는 요구다.

“이것도 노동이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확대하라!”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가 비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김씨는 플래카드를 잡고 대열의 앞에 섰다. 선글라스에 쿨토시를 채비한 허씨는 플래카드 뒤편에 자리 잡았다. 휠체어 손잡이에 단 노란 깃발 위 ‘노동’과 ‘PRIDE’라는 글씨가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마주쳤다.

휠체어들이 을지로2가 2개 차선을 막았다. 진기한 구경이라도 만난 듯 주변 상인들과 행인들이 대로변에 몰려들었다. 한낮의 땡볕에 못지않은 따가운 시선 속에 허씨도 행진을 이어갔다. 행렬의 이동 속도에 맞춰 전동휠체어를 부지런히 조작하며 따라갔다. 피곤하지 않냐고 묻자 “행진하면 재밌다. 방에 하루 종일 있는 것보다 좋다”고 했다.

지난달 발표된 국토교통부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에 따르면 전국 시내버스가 저상버스로 바뀌는 데 10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기본권이 끝없이 유예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막다른 선택이 출근길 지하철 시위와 도로 점거 행진이다. “탈시설이나 활동지원서비스나 한국이 선진국 되면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에 따라 국가에서 알아서 해준 것인줄 알았어요. 근데 아니었어요. 나 같은 장애인들이 몸에 쇠사슬 묶고 지하철, 도로를 점거하면서 투쟁해 하나하나 해낸 거더라고. 지난번 박경석·이준석 토론 때 함께 중계방송 보면서 으쌰으쌰 했어요. 시설 있을 때는 이런 것도 몰랐죠.”

귀가를 위해 종로5가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낮은 턱에도 휠체어가 기우뚱거렸다. 그나마 엘리베이터가 승강장까지 연결돼 있어 큰 불편 없이 전동차에 오를 수 있었다. 오류동역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시장통을 지난다. 횡단보도 옆 좌판에서 야채 파는 할머니가 아는 체를 했다. “니 오랜만에 보이네.” 허씨가 멈추더니 “무서운 할머니”라며 웃었다. 5000원에 무를 세 개나 샀다. “먹을거리는 조금 비싸도 노점에서 장사하는 분들 걸 삽니다. 퇴근길 지하철역에 내려서 무, 배추, 오이, 고등어 같은 거 사는 게 낙이에요.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바쁜 한 주가 마무리되고 주말이 돌아왔다. 허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며 종종 아쉬워했다. 4차 백신을 접종하러 갔다가 공교롭게도 생일날 열리는 음악회 초청권을 받았다며 2년 만에 예배당을 향했다. “시설 밖으로 나가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사람들 시선이 싫었어요. 그런데 나오고 보니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달았습니다.” 허씨는 일을 시작한 뒤로 매일매일 생각이란 걸 하면서 살게 됐다고 한다. “시간에 맞춰 움직이려면 미리 계획을 해야 해요. 여의도 이룸센터, 대학로 노들야학에서 모이라고 하면 어떻게 가야 할지 생각을 해야죠.”

그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라는 성서 구절처럼 탈시설로 “나의 지역이 넓어졌다”고 했다. “김포 시설에만 살던 시절이 있었고, 방송고등학교를 다니며 영등포까지 지역이 넓어졌죠. 지금은 서울시내를 다 돌아다닙니다.”

그에게 앞으로 소원을 물었다. “세계 평화”라고 짓궂게 답했다.

허혁씨가 생일인 9월4일 서울 구로구 집에서 김점지씨의 축하를 받고 있다. 강윤중 기자

*향유의집: 2009년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 산하 김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던 장애인들이 투쟁을 벌이면서 탈시설의 초석이 마련된다. 공익이사가 들어가면서 석암재단은 ‘프리웰’로,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향유의집’으로 바뀌었다.

**접근성: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은 접근성을 “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고, 사회에 완전히, 그리고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규정한다. 이동권은 단순한 수송이 아니라 교통수단을 통한 ‘사회에 참여할 권리’로 봐야한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교육·건강·노동 전 생활영역에서 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규정한다. 한국은 2008년 협약을 비준했으며, 국내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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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 | 김보미(전국사회부) 배문규·김한솔·김지혜(스포트라이트부)
||||  사진·동영상 | 강윤중·성동훈(사진부) 최유진(뉴콘텐츠팀)
||||  인터랙티브 콘텐츠 | 박채움·이수민(다이브팀) 현재호(디자인팀)
||||  편집 | 채희현·임지영(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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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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