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반도체 기업들이 기재부에 바란 건 돈 1000억원이 아니다

세종=박소정 기자 2022. 10.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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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전력·용수 인프라 예산 1000억원을 둔 공수(攻守) 다툼이 치열하다. 예산당국은 산업통상자원부가 당초 요청했던 반도체 인프라 예산 1000억원을 거절해 정부 예산안에 넣지 않았다가, 뒤늦게 이를 인지한 윤석열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에 관련 예산 증액을 내부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국민의힘 반도체특위(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가 증액 요구한 금액은 총 1893억원이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이 반도체 인프라 예산 편성을 반대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직접적인 현금 보조로 단순히 기업의 비용 절감을 돕는 방식이, 국가의 반도체 사업 역량을 키우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이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은 용수나 전력 인프라를 구축할 투자 여력이 충분한데, 나랏돈으로 현금 더 얹어주는 식의 지원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법인세 인하나 연구·개발(R&D) 세액 공제 등 세제 지원책을 추진하는 것으로도 기업들을 경제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세금을 단순히 기부금처럼 써선 안 된다는 것이 기재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반도체 기업들은 현금 1000억원을 더 얹어 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현재 경기도 용인에 반도체 클러스터(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SK하이닉스는 공업용수 취수 문제로 경기도 여주시와 갈등을 빚고 있다. 여주시 측은 남한강 물을 끌어가면 농업용수 부족 등의 문제로 지역 발전이 저해될 수 있다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공업용수를 끌어다 쓰는 만큼 여주시에 상생 방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각종 민원 요구를 기업 혼자 끌어안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자체 요구를 들어주면, 또 어디서 어떤 이해 관계자가 새로운 요구를 들고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기업이 노출된 셈이다.

삼성전자 역시 2015년 착공한 평택 반도체 공장의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데 5년이란 세월을 썼다. 인근 안성시 원곡면 주민들의 건강권을 이유로 송전선로 건설 문제가 법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다. 지방자치단체든 주민이든, 이해 관계자와의 갈등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애로사항을 정부가 함께 해결해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체 기업들은 총 2조원이 소요되는 용수로와 전기 시설 등 인프라 비용 절반을 직접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산업부는 이를 근거로 내년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 사업비 3800억원 중 1000억원만 국비로 지원해달라고 기재부에 요청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인프라 구축을 민관(民官)이 함께 추진하자는 제안이었던 셈이다. 사업 추진의 애로 사항을 정부가 덜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돈 1000억원의 문제로 접근한 기재부의 논리는, 기업들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외면하는 비정함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반도체특위 위원장인 무소속 양향자 의원은 법적 근거를 채비해 다시 반도체 인프라 예산 편성의 당위성을 정부에 설득하고 나섰다. 지난 8월 4일 시행된 국가첨단전략산업법(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20조 ‘국가 또는 지자체는 특화단지 운영에 필요한 경우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에 따라서다. 국가 전략 산업이라면 애초에 정부가 법적 논리를 찾아 나서는 등 전향적으로 나서야 했던 사안이지 않을까 싶다.

전 세계가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땅도 주고, 세금도 깎아 주겠다며 우리 기업들을 유혹하고 있다. 수로와 전력을 구축하는 정부의 일을 우리나라는 어쩌면 기업들 덕에 공짜로 하고 있는 셈이다. 반도체 인프라 구축 국비 지원은 대기업 지원이 아니라, 국가로서 해야 할 책무다.

예산당국은 이번 사안을 ‘비용’의 문제로 단순화시키지만, 기업이 원하는 건 사업에 대한 정부의 애정과 관심이다. 그 바람을 외면한 국가는 향후 경영하기 어렵다며 기업이 밖으로 떠나버린대도 붙잡을 명분이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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