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중세 기후일탈과 대응을 현재에서 보다

국제신문 2022. 10. 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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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은 상생해야 기후재난 대응할 수 있어
위기 때 스스로 되돌아본 선조들 정신 본받았으면

지구촌 구석구석이 온난과 폭서를 넘어, 예측 불가함과 국지적인 기후불균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소위 기후일탈이 오늘만의 일인가.

거꾸로 올라가면 중세의 10, 14세기에도 기후는 대체로 온난했다. 당시의 기온은 평균 온도보다 2도 정도 높았다. 중세 온난 기후 중 최저온도인 V계곡 지점은 12, 14세기이다. 한랭의 시기 태양의 흑점은 점차 커지고 뚜렷해진다. 태양의 빛을 가리는 흑점이 짙어지거나 커지면 낮아진 복사열로 인해 지구 표면도 냉각된다. 차가워진 지구는 자기력을 둔감시켜 해류 변동을 초래한다. 한랭한 12세기는 고려 예종 인종 연간, 14세기는 공민왕 이후가 해당한다.

12세기에는 직전의 백두산과 일본의 화산폭발에서 생겨난 화산재가 토양을 덮어버려 곡물의 저생산으로 이어졌다. 낟알의 숫자와 크기가 작아져 생산할 곡물량이 현저히 줄고, 기층민의 재생산기반까지 위협받았다. 농업생산에서 이탈한 대량의 유민 일부는 동아시아 해역에서 해상활동을 행함으로써 생계를 모색하려 했다. 장기간에 걸친 이상기후 변동과 해류의 불안정으로 바다에서는 파선 사고가 연이었다. 동아시아 해역을 둘러싼 고려 송 일본의 표류민이 다수 속출하였다.

중세 기후는 불규칙하여 폭서일 때 춥고, 혹한일 때에도 수시로 더웠다. 기후의 불순은 메뚜기와 송충이를 키웠고, 이들 작은 곤충은 사람의 먹거리를 해치웠다. 만성적 식량 부족은 영양결핍과 면역력 저하로 이어졌다. 면역결핍 된 인간은 토착하던 질병과 함께 새로 유입되어 온 바이러스성 전염병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었다. 기층민에게서 면역결핍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자구책으로 부모나 자식의 인육(人肉)까지 사고파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곡물생산의 저하와 면역결핍이 초래한 감염성 질병과 사망은 당시 사회를 이끌어가던 국왕과 관인에게도 예외 없었다.

질진(장티푸스)으로 사망한 예종. 그의 죽음에 조문사로 참여한 북송사람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방문 당시 궁궐이 거의 90% 비워진 것으로 스케치하였다. 궁궐에 기거하면서 왕을 접대해야 하는 시종 신료와 궁녀 모두 예종에게서 전염되어 모조리 죽은 것 같다.

중세 온난의 틈새 속 유독 추운 시기는 인종대이다. 3, 4월인데도 얼음이 무시로 얼었다. 얼음은 상장례 거행 시 사체의 부패를 방지하거나 제사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 얼음의 채빙과 장빙 자체도 쉽지 않고, 곳곳에 보관 시설도 없다. 얻기 어렵고 저장이 쉽지 않은 귀한 계절용품인 만큼, 얼음을 뜨거나 소비를 해야 할 때는 추위에 감사하는 사한제를 올렸다. 종종 퇴직한 관인에게 더위를 잘 견디시라 얼음을 반급해 주었다. 얼음의 최대소비처인 수도 개경엔 빙고나 빙실의 흔적을 찾긴 쉽지 않다. 다만 국왕이나 왕실 가족의 장례를 궁궐 뒤쪽 빈전이나 별전에서 치렀기 때문에 그 부근에 빙실이 있었을 듯하다. 일반민이 귀한 얼음을 항용하기 까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 시기는 가히 기후일탈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같은 달에도 온냉이 자주 교차했다. 폭서에 겪는 대표적인 자연재해는 가뭄이다. 가뭄을 혹독하게 겪은 예종, 인종 전후하여 국왕이 거처하는 심장부인 궁궐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연속하여 일어났다. 궁궐 화재는 이자겸의 난과 금의 침입이 가져온 인재(人災)일테지만, 대기 중 수분량이 절대 부족한 가뭄 시의 건습과 맞물린 기후위기가 초래한 결과이다. 쉬이 꺼지지 않은 불길 탓으로 궁궐 전역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인종은 소실된 궁궐의 전각을 개보수하거나 명칭을 바꾸어 빠른 시일 내 재난을 수습하였다.

기후일탈과 재난에 대처하던 중세 국왕의 자세는 군주의 실책에 하늘이 문책하는 것으로 보아, 극도의 자기절제로 표출되었다. 검약하여 반찬 수를 줄이고 군신과 직접 만나는 조회도 그만두었다. 중앙차원에서 구제금이나 재정보조를 행하는 것도 중히 여겼다. 홍수나 화재에 맞서 숲 조성과 보호 수종의 나무 심기가 국가에서 법으로 강제될 정도였다.

재난은 Dis(별자리), Astar(분리 불일치)의 합성어이다. 불규칙·어긋남·비일상성·예측 불가하다는 의미가 재난이라는 말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동양의 재해는 전쟁과 화재·수해를 두루 칭하며, 각기 다른 한자어 표기를 쓴다. 동서양 모두 중세인의 사유체계 속에서 기후재난은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서 생겨난 것들이다.


21세기 전 지구적 기후 재난에 맞서 인류가 생존하려면? 그 해법은 바로 자연과 인간의 지속가능한 ‘상생과 공존’에 달려있다. 더러는 중세기후 일탈이 초래한 위기에 대응하여, 자신부터 점검하던 전근대 국왕의 자세를 되짚어 봤으면 한다. 민의 삶부터 챙기던 애민(愛民) 의식을 지녔거나 스스로 자기반성에 철저한 위정자는 지금의 우리 시대엔 정녕 찾기 어려운가.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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