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안내방송, 배려와 관리 사이

한겨레 2022. 10. 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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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베를린 시내에서 출발하는 도시 전철. 독일 지하철 안내방송은 출발 시각과 장소, 연착 또는 출발 지연이나 플랫폼 변경 등에 관한 내용 정도만 다룰 뿐이어서, 한국 지하철 안내방송보다 빈도수가 훨씬 적다. ‘감사합니다’와 같은 의례적인 인사 문구도 없다. 로버트 파우저 제공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학회 발표를 위해 벨기에에 왔다가 독일 중부 도시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인 미술 행사인 ‘카셀 도쿠멘타’를 보고 지금은 베를린에 와 있다. 코로나19 이후 유럽은 처음이다.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한국과는 안내방송이 사뭇 다르다. 가장 다르다고 느낀 건 빈도수다. 벨기에와 독일 기차역에서는 출발 시각과 장소, 연착 또는 출발 지연이나 플랫폼 변경에 관한 안내방송이 주를 이룬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목적지 안내가, 마스크 착용이 필수인 독일에서는 마스크 착용 의무에 대한 안내가 독일어와 영어로 함께 나온다. 그게 거의 전부다.

한국은 다르다. 지하철 객차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열린다고 닫힌다고 조심하라고 안내한다. 코로나19 이후로 버스를 탈 때마다 마스크 착용 안내가 나온다. 내가 탈 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탈 때도 계속 들어야 한다. 개찰구가 많은 지하철역에서 반복적인 안내는 때로 잡음처럼 들린다.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종일 가는 곳마다 안내방송이 들린다. 그래서일까. 빈도가 낮은 벨기에와 독일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어쩐지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이다. 이는 곧 도시 전체 이미지로도 연결된다.

내용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감사하다는 인사로 끝을 맺고, 지하철역 가까운 장소나 공공시설 등을 따로 안내해주기도 한다. 독일이나 벨기에에서는 굳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덧붙이지 않는다. 안내 목적은 공지사항 전달일 테니 듣는 이들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고, 없어도 이상하지 않다.

언어도 관심 대상이다. 한국과 달리 베를린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지만 대중교통 안내방송은 독일어로만 한다. 영어 안내문이 곳곳에 있고, 외국인들은 대부분 휴대폰으로 모어 정보를 확인하니 굳이 다른 언어로 안내방송까지 하는 건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벨기에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국가다. 이들 두 언어 사용자 사이 갈등을 막기 위해 장소에 따라 중립적인 언어로 영어를 함께 쓰기도 한다. 학회가 열린 곳은 네덜란드어 지역이었다. 이곳의 안내방송은 주로 네덜란드어로만 하고 꼭 필요한 곳에서만 프랑스어와 영어 안내를 한다.

안내방송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인 것 같다. 한국이나 독일, 벨기에 모두 승객을 돕기 위해 안내방송을 한다. 하지만 벨기에나 독일에서는 안내방송을 이정표나 지도, 안내 표시, 그림문자와 비슷하게 여기고 특별한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안내방송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내릴 역을 전광판으로만 안내하면 승객이 졸다가 지나칠 수 있지만 안내방송이 나오면 졸다가도 그걸 듣고 제대로 내릴 수 있으니까.

즉 독일이나 벨기에에서는 꼭 필요할 때만 하는 안내방송을 한국에서는 고객을 배려하는 일종의 서비스 개념으로 여긴다. 얼핏 보면 한국 쪽이 고객 중심인 것 같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하면 고객을 위한다기보다 그런 배려를 통해 서비스 제공자의 성실함을 드러내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 나아가 이런 서비스는 배려인지 관리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친절하긴 하지만 들여다보면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라는 안내가 지나치게 많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로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스스로 할 줄 모른다고 전제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하차입니다’라는 당연한 안내를 그렇게 매번 들어야 할까. 승객들에게 필요한 정보만 간결하게 제공하는 독일이나 벨기에 쪽이 오히려 고객 중심으로 여겨진다.

군사독재 시절 한국 국민에 대한 관리는 매우 엄격했다. 남자들 머리와 여자들 치마 길이를 국가가 정했다. 기준에 안 맞으면 거리에서 강제로 머리를 깎고, 치마 길이를 측정했다. 국민 생활습관을 교정하기 위해 수많은 ‘운동’을 펼쳤고, 그 산물인 엄격한 안내판과 포스터에 익숙한 시대를 거쳐왔다. 그 뒤 엄격한 지시어는 친절한 안내로 표현이 순화됐고, 그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를 거쳐 2022년의 한국은 겉으로 보기에 독일이나 벨기에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안내방송도 조금 달라지면 어떨까. 익숙한 배려와 관리에서 벗어나 안내방송 없이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존중하는 쪽으로 방식을 바꿔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소란스러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자세한, 반복적인 안내보다 오히려 꼭 필요한 것만 전하고 남은 시간은 조금만 더 조용하게 보낼 수 있게 하는 쪽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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