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초국적기업으로 간다!

2022. 10. 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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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젠 초국적기업이다!

1998년 경북 안동의 400년 된 한 무덤에서 나온 미투리가 잔잔한 심금을 울리며 보도된 것을 기억한다. 미투리는 삼이나 모시 등을 엮어 만든 것이니 짚신보다는 훨씬 고급 신발이다. 주목 받은 점은 그 미투리가 여인의 머리카락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남편이 젊은 나이에 병에 걸리자 아내 원이 엄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끝내 남편은 신어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자, 원이 엄마는 관에 편지와 미투리를 함께 넣었다. “이 글 보시고 내 꿈에 몰래 와 당신 모습 보여주세요”라 쓴 원이 엄마의 절절한 사랑 편지가 애틋하다.

머리카락은 서정주(徐廷柱)의 시 ‘귀촉도(歸蜀途)’에서 나타나듯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잘라 줄 수 있는 우리나라 여인의 전통적 자존심이었다. 그런 머리카락을 1960년대에서 70년대 초까지 크게 한숨 내쉬고 선뜻 다시 잘라야만 했다. ‘수출 만이 살길이다’라는 혹독한 경제현실에서 수출용 가발의 원료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흑인들은 최대의 가발 소비자이다. 1960년대 월남전 중에 공산주의 월맹(북 베트남)을 도운 중국을 제재하기 위하여 미국은 중국산 가발의 수입을 금지하였고 그것은 우리나라에 절호의 수출 기회를 주었다. 1970년 가발은 총 수출액의 약 12%를 차지하며 상위 3번째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당시의 수출은 주로 종합상사를 통한 간접 수출이었다. 더 발전되면 현지에 대리점을 지정하거나 또는 우리 기업이 판매지사를 열어 직접 수출하는 단계로 진입한다. 그보다 더 진보하여 세계화 물결을 탄 우리 기업들은 해외시장 유지와 확대의 방법으로 현지법에 따라 생산, 판매법인을 세우는 등의 해외직접투자(FDI: Foreign Direct Investment) 단계로 순차적인 발전을 했다. 해외법인 지분의 20% 이상 확보를 해외직접투자라 보고, 그 미만의 지분 소유는 의사결정권이 약해지니 간접투자로 보는 것이 경영학상 일반적 구분이다.

해외직접투자의 동기와 이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본국의 모회사는 해외사업에 대해 더 강력하고 신속한 통제와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이점은 핵심기술과 핵심자재 그리고 브랜드 등 주요 경영자산의 거래를 리스크 있는 제 3자가 아닌 모회사와 자회사 간 ‘내부거래화(Internalization)’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역량과 경험을 내부에 축적하여 성장한 삼성, 현대차, LG, SK, POSCO 등과 그들의 자매회사들이 이른바 다국적기업(MNC; Multi-National Corporation)이 되어 지금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국적기업이란 본국(Home Country)의 모회사가 현지국가(Host Country)에 자회사를 해외직접투자(FDI) 방식으로 설립하고, 그 두 회사간 자금, 기술, 정보, 브랜드, 전략 등 경영자원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업집단을 말한다. 국제경영학 연구로 유명한 펄머터(Howard Perlmutter; 1925~2011)는 1969년의 논문에서 다국적기업을 다음의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의사결정 및 정보전달 등에서 모회사가 있는 본국에 집중된 본국중심주의(Ethnocentrism), 반대로 현지의 자회사에 집중된 현지중심주의(Polycentrism) 그리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국경을 초월한 쌍방의 긴밀한 협조로 전세계적으로 적용 가능한 기준을 가진 세계중심주의(Geocentrism) 기업이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이고 진정한 다국적기업은 본사(모회사)와 자회사라는 개념도 없이 원활한 정보교환과 상호협력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세계중심주의 기업이다.

역사상 네덜란드는 1602년 최초로 주식회사 형태의 다국적기업인 동인도회사를 세운 본국이며 그때부터 현지인들에게 많은 자율성을 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인지는 몰라도, 현지중심중의를 잘 실현한 다국적기업의 예로서는 1891년에 창립되어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필립스(Philips)사가 경영학 교과서에서 많이 거론된다. 이 회사의 글로벌 총매출에서 본국 네덜란드의 비중은 6~8%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해외 자회사들의 몫이다. 필립스의 현지중심주의는 의사결정 권한의 분권화와 각국에 파견된 우수 주재원들이 자율성을 가지고 현지의 인력을 활용하여 혁신적 기업문화를 이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분석된다.

한편, 우리나라나 일본의 다국적기업들은 직접투자를 통한 해외시장 진출 초기에 본국중심주의를 선택했다. 본사 오너 중심의 일방적 의사결정 그리고 그 결정의 적극적이고 신속한 추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지의 생산, 판매법인이 다 구축되고 안정적인 영업과 생산을 하는 시점에서는 본국중심주의는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바람직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다국적기업의 프랑스 지사장을 지낸 한 외국인 CEO는 <한국인은 미쳤다>라는 자신의 경험담에서 과도한 본국중심주의를 꼬집었다.

약 20년 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국적회사는 미국 남부에 공장을 완공했다. 준공식 전 날, 주지사 등 유력 인사들과 비즈니스 파트너들을 대거 초청한 만찬이 열릴 예정이었다. 행사준비 점검을 위해 본사 중역들과 현지 중역 및 실무자들이 전화회의(Conference Call)를 가졌다. 현지 실무자는 만찬에서 메인 메뉴인 스테이크가 나오기 전에 수프 대신 샐러드를 건의했다. 한국 본사 중역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양식(洋食)에는 당연히 수프’라는 한국적 고정관념에 근거한 주장이었다. 현지 중역과 주재원은 더운 지방의 특성상 그 지역 사람들이 스프보다는 샐러드를 선호하며 참석 인원이 수백명 대규모이므로 따뜻한 수프를 일시에 서빙 하기가 곤란하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지만, 결론은 본국중심주의 기업문화상 수프였다.

세계중심주의의 기업문화를 가진 이상적인 다국적기업을 요즘은 ‘초국적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이라고도 부른다. 여러 학자의 책에서 약간씩 다르게 설명되는 단어이지만, 일반적으로 ‘초국적기업’이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본국이나 현지중심주의의 획일적 효율성에서 벗어나, 본사와 자회사가 비전(Vision)과 지식은 공유하되 의사결정에서는 분산된 유연성을 가진 상호 의존적인 조직 모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쉽게 말한다면 핵심과 주변이라는 구별이 없이 다국적 기업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당연히 너무 이상적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초국적기업에서 자회사는 현지에 맞게 차별성을 추구하여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경영자 및 핵심 관리자는 국적 불문하고 능력에 따라 채용되어 보직이 주어진다. 거의 모든 다국적기업이 초국적기업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일각에서는 포천(Fortune)지가 선정하는 500대 기업 대부분이 초국적기업이라 말할 수 있다하며, 대략 세계 생산의 30% 이상과 글로벌 무역의 50% 정도를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추산한다.

이제 우리 경제의 견인차 다국적기업들은 완전한 초국적기업으로 성숙하는 전략과 기업문화를 서둘러 정착시켜야 한다. 비록 그들이 해외에 자회사를 설치, 운영하더라도 본국인 우리나라 경제에 공헌하는 바는 여전히 크다. 즉, 자회사가 본국에서 구매해 가는 핵심자재, 기술제공 대가로 받는 로열티 그리고 이익배당과 이자 등 모회사로의 과실송금이 그것을 말해준다. 현지 자회사에 자율성과 권한을 더 부여하고, 현지 실정에 맞게 의사 결정하여 궁극적으로는 초국적기업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적 혁신이 필요하다. 또 자회사는 현지에서 선량한 기업시민으로서 사회공헌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도 초국적기업의 기본자세이다. 여인들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수출하던 한국이 다국적기업의 원조 네덜란드를 추월하여 초국적기업의 본국으로 비약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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