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어깨[플랫]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잔뜩 긴장을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제일 친했던 우리였지만, 이제 친구에겐 ‘용돈을 올려주어야 하는 이유’를 종이에 써서 제출하는 아들과, 공원 세 바퀴를 혼자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닌다는 작은딸 하나가 있으니 대화의 주제도 예전과는 달라져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육아 브이로그와 양육의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을 찾아보고,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검색하며 어색해질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이제 막 세 살이 된 친구의 딸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와 나를 반겼다. 과연 공원을 정복한 어린이다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오는 길에 검색했던 만화 캐릭터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대뜸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 어릴 때랑 하는 짓이 똑같대”했다. “그래? 외적으 로는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은데?” 하고 돌아보니 야구 글러브를 머리에 쓰고 고무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맞다. 저 모습은 온 동네 골목을 세발자전거 하나로 누비며 모기차를 따라다니던 영락없는 너의 모습이다. 네가 자전거로 내리막길을 시원하게 달릴 때 그 뒷자리엔 항상 내가 앉아 있었는데 나는 왜 너를 만나기 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던 걸까?
초등학생 때 우리는 늘 동네 저수지에서 물총싸움,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사람이 적으면 재미없다고 먼 동네 아이들을 일부러 도발해 동네 대항전을 만들기도 했고, 가끔 장난이 지나치다고 지나가던 어른들이 꾸짖으면 그 꾸중을 향해 반항하다 단체로 벌을 서기도 했다. 학교에서 공을 쓰는 운동을 배우고부터는 늦은 저녁 조를 짜서 배드민턴과 족구를 했고, 뛰어 노는 게 지칠 무렵엔 오락실로 가서 펌프를 뛰고 철권을 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의 방식대로 뛰고, 싸우고, 놀았다.
친구가 딸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치우며 4인용 소파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밀었다. 내가 도와주려 하자 친구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 기억 안 나냐? 나 체육시간에 투포환 잘해서 소년체전 나갈 뻔한 거?” 중학교 체육시간 때였다. 학생주임이었던 체육선생님이 친구의 투포환 기록을 보시더니 나와서 두 번 정도 더 던지게 했다. 친구가 힘껏 던질 때마다 기록은 더 좋아졌고 선생님은 ‘대회에 나가봐도 되겠는데?’ 하셨다. 그런데 그때 앉아서 구경을 하던 반 남자 아이들이 친구를 향해 ‘힘센 여자’를 조롱하듯 말하고 웃기 시작했다. 뒤늦게 선생님이 나서서 제지했지만 친구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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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왜 그랬지? 출전하면 메달 땄을 수도 있었는데…. 선머슴에서 소녀가 되어가던 때라서 그랬던 거 같아. 힘센 게 괜히 부끄럽고.” 친구가 말한 ‘소녀가 되어가던 때’를 나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몸의 변화를 느낄 때, 내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인식하고, 교복 치마의 길이와, 교복 셔츠 안의 속옷을 단속 당하며 몸을 드러내는 것에 조심성이 요구될 때. 자꾸만 위축되고 더 이상 전처럼 뛰거나, 싸우거나, 놀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던 바로 그때를.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와 TV를 봤다. 송구 능력이 떨어지는 외야수는 ‘소녀 어깨’가 되고, 경기를 하다 급소를 가격당한 격투기 선수는 곧장 ‘언니’가 되는 ‘밈’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스포츠 예능이었다. 그 선수의 플레이에 한참 몰입해 대신 쾌감을 느끼다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졌다. 뭘 못하거나 무언가를 잃어야 소환되는 ‘소녀’와 ‘언니’라는 멸칭은 뭘 못하지도, 뭘 잃지도 않은 나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녀였을 때 눈치 보며 포기했던 많은 자유들을 전부 되찾고 싶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참 뒤에 답장이 왔다. ‘내가 따지 못한 투포환 메달. 우리 딸은 딸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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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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