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정선 지하 1000m에서 우주 비밀 밝힌다

정선=고재원 기자 2022. 10. 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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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연구원 고심도 지하실험시설 '예미랩' 5일 준공
강원 정선군 지하 1000m에 위치한 고심도 지하실험시설 ‘예미랩’을 찾았다. 암흑물질과 중성미자를 연구하는 지하실험실 '예미랩'은 예미산에 이미 뚫려 있는 한덕철광 광산갱도를 활용했다. IBS 제공

영화 ‘알라딘’에서 알라딘은 요술램프를 찾기 위해 사막에서 솟아오른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간다. 어두컴컴하고 음침하나 그 아래는 온갖 잡화와 보물로 가득하다. 지난달 29일 방문한 강원 정선군 예미산에서도 지하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내려간 지하 1000m 공간에서는 알라딘에서처럼 보물 대신 고심도 지하실험시설과 맞닥뜨렸다. '예미랩'으로 불리는 실험시설은 인류가 풀어야 할 과학 난제를 연구하는 과학계의 '보물'이다. 지하 1000m, 3000m2규모로 암흑물질과 중성미자 관측 등을 통해 우주의 구조와 기원을 이해하는 게 목적이다. 

지하공간으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했다. 탑승인원 제한이 4명인 좁은 공간의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곧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지하로 내려갔다. 초당 4m의 속도로 하강한 엘리베이터는 약 2분 47초 후 지하 약 587m 지점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습한 공기와 함께 어둠이 다가왔다. 박강순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 기술원은 “여기가 한덕철광광산 갱도 막장이고 지하실험시설은 아직 더 내려 가야한다”고 말했다.

지하 1000m에 위치한 고심도 지하실험시설 ‘예미랩’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한참을 내려가자 문이 열리고 습한 공기와 함께 어둠이 다가왔다.  정선=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차를 타고 경사 6.8도의 길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다 ‘IBS 터널’이라고 적힌 표지판 앞에 정차했다. 고도 989m의 예미산 정상을 기준으로 약 1000m 아래 지점이다. 잠실 롯데월드타워 2개를 쌓아 놓은 것과 같은 깊이다. 

이렇게 깊은 곳에 실험실을 마련한 것은 우주 방사능 차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하 1000m에 실험실을 구축하면 우주에서 오는 방사능이 지표면에 비해 1백만분의 1로 차단된다. 실험에서 방해가 되는 신호들을 대부분 차단해 연구환경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박 기술원은 “중성미자를 예로 들면 전자와 타우, 뮤온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뮤온은 초당 3000개가 검출기에 잡힌다”며 “초당 3000개씩 쏟아지는 뮤온 중성미자 중 실험에 필요한 것은 1년에 4~5개 정도인데 지하에 검출기를 두고 실험하면 필요 없는 것들을 걸러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구상에서 중성미자는 매초 700억개 가량이 엄지 손가락을 뚫고 지나가지만 사람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관측이 쉽지 않아 유령입자로도 불린다.

‘IBS 터널’ 표지판 앞. 고도 989m의 예미산 정상을 기준으로 약 1000m 아래 지점이란 의미이다. 정선=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표지판에는 ‘IBS 터널’이란 문구 아래 ‘아모레’란 문구도 적혀 있었다. 아모레는 몰리브덴 동위원소를 이용해 중성미자가 없는 이중베타 붕괴 현상을 관측하는 실험실이다. 중성미자는 표준모형에서 물질을 구성하는 12개 기본 입자 중 하나로 현재까지 3종류가 발견됐다. 과학자들은 4번째 중성미자가 존재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중성미자의 정확한 질량은 확인되지 않았다. 질량 등 중성미자의 특성을 알게 되면 우주의 구조와 기원을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된다. 빅뱅 이후 우주에서 물질과 반물질이 함께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물질만 비대칭적으로 남아 현재의 우주를 구성했는지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 2300m에 마련된 캐나다 서드베리 중성미자 관측소 ‘스노랩’과 1000m의 일본 도쿄대 우주선연구소 ‘슈퍼카미오칸데’, 1400m의 이탈리아 그랑사소 국립연구소 ‘보렉시노’, 2400m의 중국 진핑지하실험실 등 전 세계에서 고심도 지하연구시설을 짓고 중성미자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구진들은 고심도 지하연구시설을 짓고 중성미자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성미자의 특성을 알게 되면 우주의 구조와 기원을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된다. IBS 제공

아모레 실험실이 연구중인 '중성미자가 없는 이중베타 붕괴 현상'은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는 ‘베타 붕괴’가 한꺼번에 2번 일어나는 과정이다. 만약 중성미자가 스스로 반입자의 성질을 갖는다면 이 베타 붕괴가 2번 일어나는 동안 중성미자가 방출되지 않는다. 이때의 반감기를 측정해 질량 등 중성미자의 특성을 알아낼 수 있다. 박 기술원은 “내년부터 본격적인 연구 수행에 나서게 된다”며 “아직까지 중성미자 미방출 이중 베타붕괴를 관측한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없다”고 말했다.

예미랩에는 아모레 실험실을 포함해 총 13개 실험실이 마련돼 있다. 면적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지하실험시설로 터널을 중심으로 양 옆에 실험실들이 마련된 ‘개미굴’ 형태로 구성됐다. 박 기술원은 “외국의 지하실험시설을 탐방했는데, 큰 공간에다 여러 실험실을 몰아 두는 것은 공간 낭비가 심했다”며 “위쪽 공간이 크게 남았고, 이런 점들을 감안해 개미굴 형태의 작은 공간들을 여러 개 만드는 것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가로와 세로 각각 15m에 높이 20m의 개미굴 형태로 실험실을 만드니 화재 대피에도 유리하고, 위쪽 공간까지 활용이 가능해 효율이 좋다고 덧붙였다.

예미랩에는 아모레 실험실을 포함해 총 13개 실험실이 마련돼 있다. 면적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지하실험시설이다. IBS 제공

이미 실험실은 인기만점이다. 국가수리과학연구소(수리연)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경북대, 기상청 등의 연구팀이 사용하기로 하는 등 만실이다. 가령 수리연은 캐나다 캘거리대와 협력해 한반도 내의 미세 중력을 측정한다. 오정근 수리연 책임연구원은 “초전도 미세중력관측소로 전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중력측정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기술원은 “한국원자력연구원이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등에서도 실험실을 배정받으려고 줄 서 있다”며 “차차 입주해 고심도 지하실험시설에서 실험을 진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중성미자 국제연구 이니셔티브 ‘아이소다르(IsoDAR)’도 관심을 두고 있다. 아이소다르는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와 노스웨스턴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하버드대, 영국 맨체스터대, 일본 도쿄대 등으로 구성된 국제 이니셔티브로 4번째 중성미자 존재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다. 예미랩에 양성자가속기를 설치하는 것을 협의 중이다. 중성미자를 대량으로 생성해 근거리에서 갓 만들어진 중성미자의 특성을 연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양성자가속기가 설치될 구역 바로 옆에는 지름 20m 높이 20m의 원통형 공간이 있다. 여기에는 오는 12월 중성미자 검출기가 설치된다. 박 기술원은 “가속기와 검출기 사이 거리가 가까울수록 목표 중성미자를 찾을 확률이 올라간다”며 “중성미자 연구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예미랩에서는 우주의 약 26%를 차지하지만 현재까지 관측된 적이 없는 물질인 ‘암흑물질’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IBS 제공

이 밖에도 예미랩에서는 우주의 약 26%를 차지하지만 현재까지 관측된 적이 없는 물질인 ‘암흑물질’ 연구도 진행된다.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무거운 입자 ‘윔프’나 ‘액시온’, 비활성 중성미자 등이 유력한 암흑물질 후보로 거론된다. 1990년대 말 이탈리아 그랑사소 국립연구소가 윔프 신호를 포착했다고 발표했으나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 어떤 연구팀도 동일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의 윔프 사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약 308억원이 투입된 예미랩 구축사업은 2017년 1월부터 시작됐다. IBS는 2014년부터 강원 양양 양수 발전소 터널 옆에 지하실험실을 두고 암흑물질과 중성미자 연구를 해왔으나 규모가 작은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예미랩 구축 사업을 추진했다. 예미산에 이미 뚫려 있는 한덕철광 광산갱도를 활용했다. 600m까지 뚫려 있는 지점 이후부터 땅을 파기 시작해 지하 1000m 지점에 실험실을 마련한 것이다.

IBS 제공

김영덕 IBS 지하실험연구단 단장은 “처음엔 지하에 실험실을 마련하기 보다 나무를 둘러 방해입자들을 걸러내려고 했는데 수천억의 비용이 예상되더라”며 “지하에 실험실을 마련하는 방안을 논의했고, 땅굴 파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철광이 있는 여러 후보지들을 탐색했다”고 말했다.

국내 14개 후보지 중 예미산이 최고 입지로 꼽혔다. 중성미자이나 암흑물질 관측에 방해가 되는 지하수가 적게 나왔고, 예미산 꼭대기가 평탄해 지표면으로 인한 방해 요소도 적었다. 박 기술원은 “땅을 파내며 예미랩을 만들 때 사고가 1건도 없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예미랩을 안내하고 있는 박강순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 기술원. IBS 제공

IBS 지하실험연구단은 5일 준공식을 개최했다. 이번 준공식을 계기로 2023년부터 양양실험실의 실험장비도 이전한다. 김 단장은 “세계 최초로 암흑물질 신호를 잡았다는 연구결과를 내길 희망한다”며 “세계에서 관련 연구를 선도하겠다”고 말했다. 

노도영 IBS 원장은 “예미랩의 공동 활용을 활성화해 다양한 국가 과학기술 분야의 성과 창출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준공식에 참여한 오태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은 “기초과학 역량을 높이기 위해 거대 연구시설에 대한 투자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선=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정선=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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