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詩:選)>무심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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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기일 당일엔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으니 산소엔 전날 가자고,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부끄러웠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무심함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며, 마음 씀이란 기질이기보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나의 무심함을 도로 깨닫게 된 것은 참묘를 하러 가는 길에서였다.
아무도 나를 나무라지 않는데, 어쩌면 나무라지 않아서 나는 계속계속 작아졌고 하마터면 사라져버릴 때쯤, 산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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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이라는 담이 있다/ 담의 위쪽 하늘가엔 미풍에 떠가는 염소구름들// 카니발의 아침에 날아든 부고처럼/ 모든 대오에는 왜 장의행렬의 냄새가 나는지// 자못 태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의/ 휘몰아치는 마음의 그 물결 문양들’
- 김명리 ‘냉담’(시집 ‘바람 불고 고요한’)
아버지 기일 당일엔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으니 산소엔 전날 가자고,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부끄러웠다. 실은 잊고 있었다. 중년이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나는 날짜에 맞춰 기념하는 일에 서투르다. 아무리 잘 포장해도 무심함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며, 마음 씀이란 기질이기보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되레 뻔뻔하게 굴고 말았다. 내 속셈을 잘 알고 있을 가족들은 그러나 모른 척 동의를 해줬다. 그리하여 나는 올해도 모면을 하게 됐고, 부끄러움은 쉽게 잊고 말았다.
나의 무심함을 도로 깨닫게 된 것은 참묘를 하러 가는 길에서였다. 화창한 날씨 속을 내달리려니 야유회라도 가는 기분이 되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란 소재에 다다라서 나는, 내가 가족들의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들킬까 봐서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는 명랑해지고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아무도 나를 나무라지 않는데, 어쩌면 나무라지 않아서 나는 계속계속 작아졌고 하마터면 사라져버릴 때쯤, 산소에 도착했다. 돗자리를 펴고 포와 과일을 마련하고, 가족들은 이런 사람도 장남이라고 가장 먼저 술을 따르라는 거였다. 나는 한 잔 가득 술을 따라놓고, 내년에는 조금 더 유심해지겠노라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다짐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작년에도 이런 다짐을 했었던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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