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는 연주'로 음악을 더 자유롭게"

2022. 10. 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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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니 우승' 1년..피아니스트 박재홍
세계에서 가장 바쁜 연주자 중 한 명
9~10일 정명훈의 경기필과 협연 이후
영국·스위스·독일 등지서 잇단 무대
콩쿠르 준비 과정서 속박된 느낌에 불편
부담 털어내니 음악 안에서 자유로워져
더 대범한 시도로 '나만의 연주' 도전
피아노보다 항상 작곡가가 들리는..
그런 느낌 나눌수 있는 연주가가 꿈
볕이 좋은 날이었다. 가을 햇살을 느껴보자는 이야기에 피아니스트 박재홍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건반 삼아 누를 것처럼 펼친 그의 손가락 사이로 가을 햇살이 찾아 들었다. 박해묵 기자

라흐마니노프에서 브람스, 슈만과 스크랴빈, 프랑크에 이어 차이콥스키까지….

스물셋의 피아니스트, 박재홍의 가을은 변화무쌍한 표정을 담고 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여름의 흔적들, 그 위를 빨갛고 노란 계절의 변화가 덮어간다. 그의 음악은 고즈넉한 풍경화였다가, 생동감 있는 인물화였고, 빈틈없이 치밀한 정물화였다. 박재홍은 열흘 사이 이어진 네 차례의 한국 무대에서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모두 다른 작곡가의 너무도 다른 성향의 곡이었다. 필연적으로 ‘팔색조’가 될 수 밖에 없는 시간 동안 그는 완벽하게 다른 얼굴이 됐고, 피아노 앞으로 여러 자아를 꺼내 놓았다.

“어찌 보면 연주자는 연기자와 비슷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대본에 따라서 컷컷마다 다른 감정과 다른 표정을 연기하는 것처럼 하나가 끝나면 바로 잊고 새로운 것에 몰입해야 하니까요.”

지난 9월 말 열린 마포문화재단 ‘M클래식축제’ 리사이틀을 마친 다음 날 만난 박재홍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연주할 땐 완전히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스스로 어떻게 쳤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이 몰입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너무나 좋았다”고 말했다. “제 기준의 만족도로 치면 50%만 넘어가도 대성공이에요. 이번 리사이틀은 50%를 넘겼어요.”

줄줄이 이어지는 공연을 매번 다른 프로그램으로 준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박재홍은 “나름의 챌린지였는데, 덕분에 피아노와 이야기도 많이 나눠 좋은 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피아니스트 박재홍. 박해묵 기자

■ 부소니 우승 후 1년…“대범하고 자유로워진 음악”

지난 일 년 사이 피아니스트 박재홍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지난해 9월 세계적 권위의 이탈리아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세계 무대는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를 주목했다. ‘순수 국내파’였던 그는 당시 콩쿠르에서 4개 부문 특별상을 포함해 5관왕에 오르며 단숨에 ‘클래식 스타’로 도약했다.

콩쿠르 이후 스스로 체감하는 변화가 많다. 치열한 경쟁을 마치자, 음악가로의 ‘자유’를 얻었다.

“콩쿠르를 준비하는 과정에선 어딘가 옥죄어오는 듯한 기분과 속박된 느낌이 컸어요. 이전까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젠 점점 대범해지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마음의 무게와 경쟁의 압박을 덜어내는 것은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원래는 아폴론적 관점에서 곡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연주자였는데, 점점 디오니지안(Dionysian)이 돼간다. 점점 더 본능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 연주라는 것은 첫 번째는 작곡가, 두 번째는 자기만의 독창성(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이 들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결국 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작곡가가 들리는 연주를 하려면 나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어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아야 하는 거니까요. 악보를 철두철미하게 즐기고, 텍스트와 배경을 이해해 이 곡에 대한 이야기꾼이 되고, 그 위로 나만의 향신료를 첨가하는 연주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계기는 지난 8월 볼차노 페스티벌에서 ‘러시아의 거장’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를 만나면서였다. 그는 “(연주자로서) 음의 의미와 본질을 탐구하며 나만의 것을 찾으려 해도, 작곡가의 생각에서 시작된 것을 과연 나만의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에 대한 명쾌한 답이 없었다”며 “소콜로프의 연주를 듣고 느낌표가 백만개가 떠올랐다”며 눈을 빛냈다.

“결국 음악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감상과 사상을 예술적인 도구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연주는 순수 창조가 아닌 재창조의 개념이라 다른 예술과는 조금 다르죠. 적혀 있는 악보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니까요. 저한텐 (악보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었는데, 이 안에선 조금 덜 조심스러워도 되고, 조금 더 대범하게 해석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최근 리사이틀에서 연주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무대 위에서 느끼는 대로 ‘나만의 색깔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연주했다. 그는 “리허설 때부터 다르게 쳤지만, 슈만의 색깔에서 많이 벗어나진 않았다”며 “한꺼풀 벗겨진 느낌이 들어 한편으론 기뻤다”고 말했다.

“요즘 음악적으로 많이 자유로워졌어요. 그래서 행복해요. 제가 쓰지 않았던 팔레트의 색깔에 자꾸 손이 가요. 정말 재밌어요.”

지난해 9월 세계적 권위의 이탈리아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박재홍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연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난 8월 유럽에서만 9개의 공연을 마쳤다. 오는 9~10일 정명훈이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을 마치면 바로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연주회를 시작한다. 박해묵 기자

자유로움 안에서도 잃지 않고 지켜내려는 방향성도 세웠다. ‘비워내는 연주’다. 박재홍은 “콩쿠르 이전엔 내가 준비한 것이 100이라면 적어도 60~70은 보여주려고 했다”며 “연주를 하나의 성취율이 나타나는 과제처럼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하나밖에 없어요. 놓자, 그냥 놓아주자, 뭔가를 작위적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음악을 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비워내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그에게도 “증명해야 할 것 같고, 나를 빛내기 위해 더 잘 쳐야 할 것 같은 시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 음악에 진심이 없어지고, 가식적이고 작위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음악은 연주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드러나요. 그래서 무서운 것 같아요. 음악엔 그 사람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춰지니까요.”

탐구하고 사유하는 연주자이면서,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를 건네는 그에겐 모든 연주자가 스승이었고, 이들의 연주가 깨달음을 줬다. 그는 “저만의 착각일 수 있지만, 대가들의 연주는 늘 담담하고 담백하다”고 했다.

“(대가들이) 스페셜한 모먼트를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고민했는데, 제 답은 하나였어요. 모든 순간이 특별하고, 그 사람과 그 사람이 하는 음악이 특별하기에 어느 한 부분을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그는 소콜로프를 비롯한 대가들의 연주를 만나며 몇 번이고 ‘각성의 순간’을 맞았다. 그 때마다 박재홍은 그동안 쌓아온 피아노의 시간들을 뒤흔드는 경험을 맞았다. “이 때까지 내가 해온 것을 부정하게 되고,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연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웃음) 행복하게 자존감이 떨어지는 계기가 됐어요.”

그날 이후 박재홍의 연주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한 발 한 발 딛고 있다.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놓아주려는 연주”를 찾아가고 있다.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철학 공부는 박재홍이 닿으려는 ‘이상적 피아노’에 대한 논리적 설득을 더한다.

“서양철학은 꽉 차있는 것을 본질이라고 하더라고요. 전 그것을 제 연주에 대입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많은 생각과 아이디어로 작곡가를 대변하는 연주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동양철학은 비워내야 본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저 놔주고 비우는 것이 저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고 작곡가를 빛나게 하는 것 같아요. 흘려보내면 얻는 본질이 크다는 것을 느낀 때부터 삶의 모토 역시 놓아주고 흘려보내는 방향으로 달라졌어요.”

박재홍을 둘러싼 모든 음표의 90%는 클래식 음악이나, 꽤 높은 비중으로 그의 삶을 차지하는 음악가는 밴드 콜드플레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모든 콩쿠르의 준비과정에서 지칠 때”마다 ‘픽스 유(Fix You)’를 들었다. “멜로디 하나, 레이어 하나, 화성을 쌓아나가는 과정이 범상치 않은 대단한 밴드”라며 감탄한다. “가사가 있는 음악을 좋아하진 않는데, 콜드플레이의 가사는 너무나 좋아해요. 특히 ‘픽스 유’요. 콜드플레이가 제 음악의 5%는 차지해요. (웃음)”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KBS교향악단. [마포문화재단 제공]

■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연주자…“겸허하고, 겸손하게 음악하고 싶다”

박재홍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연주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국내외에서 이어지는 많은 숫자의 공연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 8월 유럽에서만 9개의 공연을 마쳤다. 오는 9~10일 정명훈이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마치면 바로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연주회를 시작한다. 이후 스위스 쥐리히, 독일 라이프치히, 이탈리아 베로나 등에서 리사이틀과 협연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내년엔 정명훈의 아들 정민 지휘자와 산토리홀 데뷔 무대도 갖는다. 이번에도 각기 다른 프로그램으로다.

“정명훈 선생님께선 연주가 끝나면 그 연주에 대한 모든 걸 깔끔하게 잊고 새로운 것에 착수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해야 다음 연주에 몰입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점점 공감하게 돼요. 좋았던 연주든 나빴던 연주든 소회가 길어질수록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얼른 잊고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하는 거죠.”

이젠 차이콥스키를 위한 시간이다. 박재홍이 좋아하는 작곡가는 “베토벤, 바흐로 고정”돼 있지만, “지금 치고 있는 작곡가”는 높은 비중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박재홍이 연주할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10월 9일·경기아트센터, 10월 10일·롯데콘서트홀)은 정명훈이 1974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한 뒤, 축하공연에서 연주한 곡이다.

박재홍은 “정명훈 선생님은 지휘자로도 피아니스트로도, 음악가와 예술가로도 존경하는 분”이라며 “3분의 1의 기대와 무서움과 설렘, 좋은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너무나 긍정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하고 있어요. (웃음) 대한민국의 어떤 연주자든 어릴 때 음악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나중에 정명훈 선생님과 같이 연주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 선생님은 한국 클래식에 있어 선도자, 선구자의 역할을 엄청나게 많이 하신 분이시니까요. 이렇게 좋은 만남이 성사돼 너무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워요.”

피아니스트 박재홍. 박해묵 기자

첫 리허설은 오는 8일로 예정돼있다. 박재홍은 벌써부터 목표가 있다. “리허설도 일분 일초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배울 생각”이라고 한다.

“정명훈 선생님의 브람스 독주회를 보고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나요. 정명훈 선생님의 연주에선 어떤 가식이나 꾸밈도 없다고 느껴졌어요. 언제나 본질을 들려주시는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쁘게 포장하고 미화하는 연주에 지쳐있을 때 본질이 가득한 음악을 들으면 디톡스가 돼요.”

‘지휘자로의 꿈’도 품고 있는 그에게 피아니스트이면서 지휘자인 정명훈은 크고 거대한 이상이다. “피아노 음악만 치기엔 세상엔 너무나 많은 음악이 존재”하고, 숱한 명작이 남겨진 음악장르인 심포니를 “피부로 경험해 보고 싶어 지휘의 꿈도 키우게 됐다”. 정명훈이 지휘한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박재홍이 가장 좋아하는 연주이고, 정명훈의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그가 가장 즐겨보는 영상이다. 박재홍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들”이라며 “이번 리허설과 연주가 배움의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연주와 관심만큼 한국 클래식계의 스타로 떠오른 박재홍의 왕관은 점차 무게를 더해간다. 그는 “어떤 무대에 선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라며 "요즘엔 소중한 시간을 써서 찾아주는 관객들에 대한 책임감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리사이틀 이후 이어진 팬사인회엔 젊은 관객들은 물론 백발의 관객들도 찾아왔다. 노년의 클래식 애호가들은 그에게 “심금을 울려줘 고맙다”는 인사도 건넸다. 박재홍은 “연주자는 항상 음악 전달자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오롯이 잘 전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음악을 찾는 것은 음악인들에겐 평생의 숙제인 것 같아요. 박재홍이 피아노 잘 친다는 이야기보다, ‘이 사람, 정말 위대한 작곡가다’라는 느낌을 먼저 나눌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언제나 연주자는 작곡가를 섬겨야 하고, 먼 발치에서 작곡가를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봐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계속 겸허하게, 겸손하게 음악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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