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망하는 관극은 그만..관객도 극의 일부가 된다
엔데믹 분위기 타고 속속 무대에
세계 미식여행 '그랜드 엑스페디션'
암전 속에 진행 '다크필드 3부작'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배우와 관객의 구분도 모호하다. 보는 것을 넘어 몸으로 부딪히고 체험하며 관객은 그 자체로 공연의 일부가 된다. 관객 몰입형 공연을 뜻하는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re)’는 수동적인 감상을 넘어 관객이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하는 공연으로 공연예술계의 새 흐름으로 각광받았다. 2000년대 초중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던 영국의 극단과 예술인들이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극장(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액자 모양 구조)에서 벗어나 도시의 버려진 공간 등에서 공연을 하며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가장 성공한 이머시브 시어터 작품으로 꼽히는 영국 극단 펀치 드렁크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뉴욕의 한 물류창고를 개조한 5층짜리 호텔 건물에서 공연한다. 관객은 흰 가면을 쓰고 입장해 호텔의 객실 100여곳을 누비며, 셰익스피어 <멕베스>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의 조각들을 찾아간다. 관객이 스스로 결정한 동선에 따라 다양한 시점으로 서사를 만들어가는 등 창작자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사보다 관객의 능동성과 주관적 체험에 집중한 것이 이머시브 시어터의 특징이다.
무대와 객석 간 경계를 허물어 관객의 역할을 확장하는 이머시브 공연이 엔데믹 분위기에 다시 찾아왔다. 마스크를 쓴 채 말없이 공연을 관람해야 했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지나, 세계적으로 흥행한 공연들이 다시 한국 무대를 두드리고 있다. 미식과 여행을 결합해 오감으로 즐기는 동화적인 공연부터,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과 상상력을 깨우는 오싹한 공연도 있다. 관객이 원하는 만큼 참여하고, 참여한 만큼 즐길 수 있는 공연들이다.
열기구 타고 세계 미식 여행 떠나볼까…오감으로 즐기는 공연 ‘그랜드 엑스페디션’
공연장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낡은 동화책 표지처럼 생긴 문을 두드리면 안내자가 등장해 관객을 자리로 데려다준다. 형형색색의 열기구로 가득 찬 공연장엔 무대가 따로 없다. 동화 속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이 열기구들이 곧 무대이자 객석이 된다.
지난달 30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막을 올린 <그랜드 엑스페디션>은 열기구에 탑승해 세계를 여행하며 그 나라의 음식을 즐긴다는 동화적인 판타지를 구현한다. 이머시브 시어터와 파인 다이닝이 결합된 ‘이머시브 다이닝(Immersive Dining)’ 형태의 공연이다. 최근 영미권에서 각광받는 장르로 한국에는 이번에 처음 상륙했다. 2010년부터 12년간 이머시브 다이닝 공연을 선보여온 영국 진저라인(GINGERLINE)의 작품으로, 2018년 영국에서 초연했다.
“우리는 이곳에 초대된 용감한 모험가입니다. 이 모험은 바람을 따라가는 모험입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우리는 마법에 걸릴 것입니다.”
안내자의 내레이션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면 ‘공기의 정령 실프’가 북풍·동풍·서풍으로 변하며 관객들을 모험으로 이끈다. 영국 그리니치에서 시작된 여정은 일본 홋카이도, 러시아 시베리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거쳐 우주에까지 이른다. 열기구들을 둘러싸고 공연장 사방의 벽에 투사된 영상이 시시각각 변화하며 도시의 특색에 맞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살린다.
바람에 실려 각 도시에 도착하면 그 도시의 특색에 맞는 독특한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등장해 음식을 서빙하고, 객석 사이를 누비며 춤을 추고 공연을 한다. 이 공연에서 관객은 그저 ‘구경꾼’이 아니다. 배우 8명은 관객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묘기나 놀이를 제안한다. 홋카이도에서 메밀면을 먹고 나면 어느새 등장한 배우들이 낚시를 하자며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물론 진짜 물고기는 아니다)를 내밀고, 북극의 바람을 타고 도착한 시베리아에서 보드카를 곁들여 러시아식 만두를 맛본 후 모두 어우러져 러시아 전통춤을 추는 식이다. 시베리아의 찬공기를 떠나 브라질에 당도하면 삼바의 열기가 모험가들을 기다린다.
지난달 29일 공연장에서 만난 진저라인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 수즈 마운트포트는 <그랜드 엑스페디션>을 “잠자기 전 듣던 동화 같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동화 속 세계로 들어가 열기구를 타고 각 나라를 여행하죠. 음식과 관객도 스토리의 일부가 됩니다.”
진저라인은 지금까지 13개 이머시브 다이닝을 선보여왔다. 지하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 오페라 속 캐릭터를 만나는 공연부터 우주선을 타고 외계행성의 음식을 맛보거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 다차원의 세계를 경험하는 ‘맛의 방’ 등 다양한 콘셉트의 공연이었다. 마운트포트는 “처음부터 상업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여는 디너파티 같은 경험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시작한 작업”이라며 “도전적이고, 모험심 있는 이들이 공연장을 찾고 그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는 “‘이머시브 다이닝’은 관객이 음식을 나눠먹고 경험을 나누는 사회적인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머시브 시어터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로렌 포스 파트리지는 “음식과 퍼포먼스, 관객의 참여가 ‘이머시브 다이닝’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라고 했다.
한국 공연에는 레스토랑 ‘에빗’의 셰프 조지프 리저우드가 참여한다.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공간도 공연장에 마련했다. 식사는 일반식과 채식을 선택할 수 있다. 공연은 내년 3월1일까지.
내가 곧 주인공이 되는 공연…“보지 말고 경험하라”
오는 22일부터 공연하는 <다크필드 3부작>은 완전한 암전 속에 진행된다. 관객이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아 헤드셋을 착용하면, 이내 모든 빛이 사라지고 소리만 더욱 선명해진다. 헤드폰을 쓴 관객들은 이 완전한 어둠 속에서 초현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영국의 이머시브 시어터 그룹 ‘다크필드’가 만든 이 공연은 각기 다른 테마를 가진 3개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관객들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죽은 자들의 대화’를 위해 여객선에 오르고(‘고스트쉽’), 목적지를 모른 채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만난다(‘플라이트’). 병실처럼 생긴 공간의 3층 침대에 누워 약을 먹고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드는 경험을 해보기도 한다(‘코마’). 360도 입체음향과 특수효과가 시각을 제외한 여러 감각을 깨우며 마치 실제로 그 공간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사운드 이머시브 분야에 특화된 ‘다크필드’는 영국의 작가 글렌 니스와 음향 디자이너 데이비드 로젠버그가 주축이 돼 만든 창작 단체다. 각기 다른 조건의 공연장에서 동일한 몰입형 공연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느낀 이들은 대형 컨테이너 안에 무대 세트를 제작하고 그 안에 관객 각자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공연을 떠올렸다. 이들은 ‘초현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고스트쉽’을 2017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여 그해 페스티벌의 최대 화제작이 됐고, 2018년과 2019년에도 같은 페스티벌에서 ‘플라이트’와 ‘코마’를 잇달아 공연해 호평 받았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 호주, 멕시코, 캐나다에서 공연한 <다크필드 3부작>은 이번 한국 공연에 앞서 배우들을 선발해 지난 8월 런던의 스튜디오와 컨테이너에서 한국어 녹음을 진행했다. 이달 서울 강서구 마곡에 새로 개관하는 LG아트센터 서울의 블랙박스 공연장 ‘U+ 스테이지’에서 선보이는 첫 공연이다.
세 편이 각각 독립된 공연으로 러닝타임은 30분씩이며 관객은 회당 30명 이내로 제한된다. 관객들이 원하는 공연을 선택해 관람할 수도, 패키지 예매를 통해 모두 관람할 수도 있다. 11월19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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