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을 들어도[오늘을 생각한다]

2022. 10. 5.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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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국의 한 병원. TV를 보던 언어상실증 병동 환자들이 일제히 실소를 터뜨렸다. TV에서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유려한 연설을 하고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담담히 혹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어상실증은 왼쪽 관자엽에 문제가 생겨 언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병이다. 환자들은 대통령의 말이 무엇이 재미있어 깔깔 웃었던 걸까? 인간의 발화는 단어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말에는 말의 의미를 능가하는 말투와 표정이 있다. 이 정보들은 대단히 깊이 있고 복잡미묘한 것으로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이 ‘필링톤’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이해력을 갖는다. 환자들은 대통령의 교묘한 거짓말을 대번에 간파하고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언어를 상실한 환자들은 역설적으로 언어에 속지 않는 능력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XX’ 발언이 보도된 다음 날 대통령실의 해명이 나왔다. 김은혜 홍보수석은 대통령의 발언 중 ‘바이든’으로 보도됐던 단어가 사실은 ‘날리면’이라고 정정했다. 온 나라가 대통령 발언을 두고 해석전쟁에 들어갔다. 방송국은 첨단음성분석기법을 동원해 음절 단위 분석 능력을 뽐냈고, 온갖 분야의 전문가·평론가들이 말을 보탰다. 오직 한사람, 이 수수께끼의 출제자만이 이 문제에 관해 입을 닫았다. 제아무리 그럴싸한 분석도 소용없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100번을 들어도 XXX’로 들린다”며 최초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100번을 들었더니 ‘발리면’으로 들린다”며 제3의 대안을 내놓은 여당 의원도 등장했다.

언어상실증 환자들을 연구한 올리버 색스는 이런 통찰을 전했다. “인간은 (자신을) 속이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속는다.” 수상한 사람을 보고 짖는 개는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직관에 집중하는 개와 달리 우리는 단어에, 마음에 현혹돼 자신의 직관을 믿지 않는다. 레이건이 교묘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할 때 뇌 장애가 있는 사람들만 빼고는 모두 속아넘어간 이유다.

이 수수께끼 판에서 가장 자연스러웠던 반응은 김은혜 홍보수석의 해명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은 기자들의 표정이다. 현장에서 포착된 즉각적인 표정은 레이건의 거짓말을 단숨에 감별해낸 언어상실증 환자들의 표정과 닮아 있었다. 그들은 홍보수석의 우스꽝스러운 해명과 물리적·시간적 거리가 제일 짧았던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직관과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정치가 동물의 왕국이 되자 다시 직관의 쓸모가 생긴다. 대통령의 말을 ‘날리면’으로 주조해낸 곡예사들은 언어의 역설을 보여준다. 훌륭한 언어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오류에 빠진 것일까. 그들은 언어를 풀이하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실패한 것은 아닐까. 뛰어난 언어 이해능력과 수상한 사람을 보고 짖는 개의 직관. 대통령의 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어느 쪽일까.

정주식 직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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