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의 바깥길] 등대로 향하여

한겨레 2022. 10. 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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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의 바깥길]다들 폭풍 전야라고 걱정이다. 이번에는 모든 정책이 '생경한 관념'과 '살벌한 이익'을 벗어나 사람들에게 다정하길. "고통을 나누고" "허리띠를 졸라매자"며 시민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편리한 정책은 없길. 그래야 등대로 향해 같이 온몸으로 저어갈 것 아닌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등대는 궁극적인 구원과 안식의 상징이다. 세월이 가르친 경외감 때문인지 그 하얀색의 눈부심 탓인지, 우연히 등대를 찾을 때면 나는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등대는 향하지만 가지 않는 곳이다. 눈이 불안하게 향하는 곳이지 발이 부산하게 찾는 곳은 아니다. 먹구름 끼고 바람 찬 날, 우리는 등대 불빛에 기대어 제 길을 갈 뿐이다. 그러니, 등대를 바라보는 눈빛은 강렬하게 모이기도 하고, 또 그 때문에 날카롭게 갈라지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를 이런 미묘한 모여짐과 갈림의 회한으로 기억한다. 바닷가 쪽으로 휴가를 간 부부는 앞쪽 섬에 있는 등대를 찾아가는 일을 두고 의견이 갈린다. 아이가 간절하게 원하는 일인지라 아내는 내일 가자고 하는데, 남편은 내일 날씨가 좋지 않을 거라고 심드렁하게 말한다. 좋을 수도 있다고 아내가 따지려 하자, 그 옆에 있던 남편 친구는 그럴 수 없다고 쐐기를 박는다. 그 이유를 묻자, 바람이 지금 서쪽으로 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 방향이 바뀔 수 있다고 따지려니, 이젠 대꾸조차 없다. 결국 계획은 무산된다. 날씨와 바람은 바뀔 수 있겠지만, 남편의 완고함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아내는 죽고, 남은 가족은 저 멀리 등대가 보이는 곳에 다시 모인다.

이 소설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지금 우리 처지 때문이다. 큰 파도 겨우 피했더니 다시 위기의 비바람이 멀리서 모여들고 해는 지고 있으니, 등대 불빛이라도 서둘러 확인해 둬야 할 상황이다. 이번 뱃길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잠시 옛일을 돌이켜 보자. 2007년 말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그야말로 대충격이었다. 경제적 고통은 말할 나위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과학적 엄격함’을 자랑했던 경제전문가들이 위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희낙락 꽃향기에 취해 걷다가 덫에 빠진 꼴이었다. 그 꽃향기는 불평등이 뿜어낸 독한 연기였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게 됐다.

하지만, 덫에 빠진 당혹스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울프 소설의 남편처럼, 인간들의 바람과 고통은 제쳐 두고 경제정책은 옹고집스러운 집념의 세계로 돌아갔다. 초특급 재정을 투입해 금융시장을 살린 뒤 경제회복과 더불어 물가상승 조짐이 나타나자, 재빨리 긴축정책으로 돌아섰다. 일자리와 소득을 잃고 기력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응급 수액마저 뽑아버린 꼴이었다. 금융에는 관대하고 사람에게는 가혹했다. 그 결과, 국민 소득(GDP)으로 측정한 경제는 성장했으나, 고용과 노동소득은 고통스럽도록 늦게 회복됐다. 세계 경제는 3~4년 만에 회복됐으나, 고용회복은 10년 가까이 걸렸고, 노동소득은 더 뒤처졌다. 위기의 원인으로 낙수효과라는 ‘주술’을 꼽기도 했지만, 위기회복책도 정작 그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0년이 넘어 다시 찾아온 이번 위기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중국 어디선가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세계를 순식간에 덫에 가둘 줄은 몰랐다. 자신이 빚어낸 잘못이 아니어서였을까, 경제정책은 이번에는 좀 더 과감했다. 재정적자나 물가를 걱정하지 않고 유례없이 자원을 총동원해서 일자리와 소득을 지켰다. 덕분에, 경제적 손해는 컸지만 삶의 고통은 덜했다. 물론 이런 ‘어둠 속의 빛’ 같은 일도 빛을 낼 여력을 가진 나라에서만 가능했다. 이미 빚에 허덕이고 재정이 바닥난 개발도상국들은 엄두를 내질 못했고, 선진국들의 도움은 입으로만 전해졌다. 특히 저소득 국가에서는 바이러스가 경제와 삶을 가혹하게 지배했다. 세계가 등대 불빛을 따라갔으나, 도달한 곳은 달랐다. 방향은 알았으나 배를 움직일 힘이 없었던 나라들은 암초에 걸려 아직 벗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다시 비구름이 몰려든다. 이번에는 또렷이 보이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마치 서서히 빠지는 늪 같다. 인간이 여기저기 싸움판을 만들어서 이 지경까지 왔다. 빠지는 줄 뻔히 알고 있지만, 안간힘을 쓰면서 더 빠져든다. “정책의 시간”이 다시 왔지만, 초라한 옛 기억뿐이다. 난해한 개념과 복잡한 통계에 ‘과학’의 이름을 입혔지만, 그 내용은 단순하다. 늪에서 당장 빠져나올 수는 없으니, 이 늪의 끝 어딘가 있을 단단한 흙바닥까지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이자율 상승이라는 무거운 추를 우리의 몸에 꽁꽁 묶어서 불황이라는 늪으로 내려간 뒤, 끝내 살아남은 자들이 바닥을 딛고 올라오는 날을 기다린다. 늪 속에 빠져 아우성인 사람들에게 로프를 던져 줄 생각은 없다. 로프를 던지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울프 소설의 남편 친구가 말했듯이 서풍이 부는 날에는 등대로 갈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는.

이런 신념은 때로는 편리하다. 등대로 향해 가진 않지만, 옛 추억으로는 쉽게 돌아간다. 영국에서는 1980년대의 추억을 끌어올렸다. 물가 상승과 경기 축소가 겹치는 상황에서 영국 정부는 감세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믿음을 기어코 “450억파운드 감세” 정책으로 바꾸었다. 세금을 줄이면 가처분소득이 늘어서 소비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는 하나, 문제는 그 혜택의 절반을 상위 5%가 가져간다는 것. 하위 50%에게는 기껏해야 총감세액의 12% 정도가 돌아간다. 부자에게는 황금 밧줄을, 나머지에게는 새끼줄을 주는 셈이다. 게다가 폭증하는 에너지와 의료비용 같은 ‘민생’은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로 조달하겠다고 하니 당장 파운드가 하락하고 금융시장이 흔들리면서 주택담보대출이 중지되거나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이 치솟았다. 그 결과, 시민들은 감세 몇푼을 훨씬 넘어서는 주택비용 증가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여론은 당연히 들끓었다. 현 정부 지지율은 27%로 떨어지고, 거리에도 긴장감이 돈다. 이제 불평등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만큼 불황의 늪은 깊어지고 있다.

소설 <등대로>에서 아버지는 아내를 잃고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아이를 데리고 등대로 향한다. 가는 뱃길 내내 부자 관계는 냉랭하다. 아들은 배를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아빠는 낡은 책만 들추며 불안해한다. 아슬하기만 한 여정 끝에 마침내 등대가 보이고, 아빠는 갑작스레 아들에게 “잘했어”라는 말을 건넨다. 머릿속에 쌓아둔 옹골진 세계에서 나오니, 야무지게 세상을 움직이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해는 등대와 함께 그렇게 찾아왔다.

다들 폭풍 전야라고 걱정이다. 이번에는 모든 정책이 ‘생경한 관념’과 ‘살벌한 이익’을 벗어나 사람들에게 다정하길. “고통을 나누고” “허리띠를 졸라매자”며 시민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편리한 정책은 없길. 그래야 등대로 향해 같이 온몸으로저어갈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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