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앙코르와트 길목에서 마주한 킬링필드

김봉규 입력 2022. 10. 4. 18:10 수정 2022. 10. 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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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제노사이드의 기억 캄보디아 _01

높이 5m 크기의 탑 안에 두개골과 대퇴부 뼈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유리창 안쪽의 두개골을 자세히 바라보았는데, 눈구멍 주변과 코뼈 부근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서늘함을 넘어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마음속으로 휑한 눈 주변에 안구를 넣고 코뼈와 위아래 턱에 살을 붙이고 입술을 그려보니 살아생전 얼굴 모습이 내 눈앞에 어렴풋하게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와트 트마이 사원 중심 불상 옆에 킬링필드 때 시엠레아프 지역에서 크메르루주군이 학살한 이들의 두개골과 대퇴부 등 유해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불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이 나라에서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계율을 저버리고 어떻게 몽둥이와 죽창으로 수십만명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엠레아프/김봉규 선임기자

캄보디아 북서쪽 내륙 관광도시 시엠레아프를 생각하면 우리나라 제주섬이 떠오른다. 양쪽 모두 민간인 학살이란 비극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섬에서는 1948년 4·3사건 당시 이승만 정권 아래 군·경과 민간인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에 의해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캄보디아 최대 관광지이며 고대 유적지인 앙코르와트의 배후 도시인 시엠레아프 지역에서도 1975년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킬링필드’ 지역 가운데 하나다.

쿠데타로 집권했던 친미 성향의 론 놀 정권을 몰아낸 폴 포트는 빈농 자녀 등으로 구성된 급진적 좌익 무장단체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를 앞세워 1979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 건설과 민족(크메르족)의 순수성을 되찾겠다며, 론 놀 정권 시절 군인과 경찰 등 공무원은 물론 전문지식인과 기술자, 성직자들까지 인민의 적으로 지목해 마구 학살했다. 미국 예일대 ‘캄보디아 제노사이드 프로그램’은 현지 조사 뒤 당시 캄보디아 국민의 4분의 1가량인 170만여명이 희생됐다고 밝혔다. 수도 프놈펜과 더불어 주민들이 강제 소개돼 농촌으로 하방되고 킬링필드가 자행됐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시엠레아프에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수습해서 모시는 와트 트마이(Wat Thmei)라는 작은 사원도 있어, 나는 이곳을 여러차례 방문해 킬링필드 당시 생존자들을 수소문해서 만나기도 했다.

코로나19 이전에 찾았던 시엠레아프 시내는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일년 내내 북적였다. 2012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시내 중심가는 크고 작은 호텔로 빼곡했고, 음식점, 카페, 술집, 마사지시술소 등을 알리는 네온사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번쩍거렸다. 와트 트마이 사원은 시엠레아프와 시엠레아프 시내에서 북쪽으로 4㎞ 떨어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 중간쯤에 있었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앙코르와트를 찾는 관광객 대부분은 시엠레아프와 앙코르와트를 바로 오갈 뿐이어서, 와트 트마이 사원은 외지인은 대부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작은 사원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누리집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킬링필드와 관련한 이 사원 이야기가 제법 알려져 있다.

소박해 보이는 사원 입구를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묻힌 황금빛 개인 묘비들이 보였다. 한낮 더위가 최고조에 이르러서였는지 사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의 눈에 띄질 않았다. 사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나란히 앉은 어린 동자승들이 카메라를 든 이방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불경 공부에 열심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그림들이 있었는데 끔찍하게도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들이었다.

빛바랜 사진들도 몇점 있었다. 1975년 킬링필드 당시 크메르루주군에 의해 수도 프놈펜 도심에서 강제로 소개당해 농촌으로 떠나는 주민들 사진이 있었는데, 사람이 끄는 인력거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노인들의 처연한 표정이 눈길을 끌었다. 프놈펜을 접수한 크메르루주군이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텅 빈 도시를 순찰하는 사진도 있었다.

사원 중심에는 높이 3m 정도 큰 불상이 있었고 바로 옆 높이 5m 크기의 탑 안에 두개골과 대퇴부 뼈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지난 킬링필드 때 시엠레아프 지역에서 크메르루주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이었다. 유리창 안쪽의 두개골을 자세히 바라보았는데, 눈구멍 주변과 코뼈 부근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서늘함을 넘어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마음속으로 휑한 눈 주변에 안구를 넣고 코뼈와 위아래 턱에 살을 붙이고 입술을 그려보니 살아생전 얼굴 모습이 내 눈앞에 어렴풋하게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2012년 이후 세차례 더 이곳 와트 트마이 사원을 찾았는데, 한 많은 유골도 자주 대하다 보니 낯선 느낌이 사라지고 처연한 친근함까지 생겨났다.

한번은 늦은 밤 사원을 찾았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불상과 유골을 모시고 있는 장소만 조명을 비추고 있어 멀리서도 환하게 보였다. 갑자기 밤비가 쏟아져 비를 피해 유골탑 처마에 다가섰는데, 한뼘 남짓 거리로 가까워진 유리창 안 두개골들이 내 귓가에 뭔가 소곤거리는 것 같았다. 몽둥이와 죽창으로 피에 물든 킬링필드 지역이 캄보디아 전역에는 200개나 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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