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양측의 협상력을 되살리는 노란봉투법

윤형중 정책연구가 2022. 10. 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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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의행위에 손배 청구를 못 하게 하면
기업은 노동자와 성실히 교섭하게 되고
노동자는 ‘불법점거’할 이유가 사라져

[주간경향] 분명히 정치가 개선할 수 있는, 아니 개입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오랫동안 방치한 문제가 꽤 많이 있다. 그런 사안을 필자는 ‘구조적 문제’라고 표현한다. 구조가 온존한 상태로 지속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은 특정한 ‘공론화의 계기’가 있어야 정치권의 논의 테이블에 올라온다. 그 계기는 대부분 돌출적인 사건·사고였다. 안타깝게도 그중 상당수는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공론화의 계기가 결실을 보기는 쉽지 않다. 여론의 관심이 지속되지 않고, 그에 따라 정치권의 핵심 의제도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쟁의행위를 한 노동자들에게 회사나 국가가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최근 오랜만에 정치권의 의제가 됐다. 이 문제를 입법으로 해결하려는 방안이 이른바 ‘노란봉투법’이다. 쟁의행위에 따른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고, 사용자 개념을 확대해 하청노동자, 특수고용직 등을 교섭 대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 법안에 담겨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올해 정기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할 22대 민생입법 과제 중에서 6번째로 노란봉투법을 꼽았다.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9월 15일 새로운 노란봉투법을 대표발의했고 법 통과에 당력을 집중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미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노란봉투법만 6개이고, ‘이은주안’이 7번째다.

김형수 대우조선해양 거제통영고성지회 지회장이 9월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 발의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파업한 노동자나 노동조합에 대한 회사의 손배 가압류를 제한하는 법이다. |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민주당’의 첫 시험대

쟁의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손해배상 가압류의 문제는 당하는 사람들에겐 극심한 고통이지만, 공론화가 쉽지 않은 사안이었다. 사안의 구조가 복잡하고 어려운데다 언뜻 보기엔 매우 강력한 손해배상 합리화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의지를 드러내자 견제의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최근 보수 언론은 “노란봉투법이 불법을 입법으로 보호한다”며 비판을 쏟아내고 있고,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단체들도 “노란봉투법이 헌법상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며 일제히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가 노란봉투법을 입법할 절호의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우선 새로운 노동·경제 환경이 노란봉투법과 만났다. 최근 손배 사업장이 된 대우조선해양, 하이트진로, CJ대한통운 모두 상대가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하청노동자, 특수고용직인 화물차 기사와 택배기사들이다. 한마디로 노동권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다. 특히 최근의 손배 사업장들은 경제 상황과도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 화물차 기사들이 운송료 인상을 요구한 이유는 ‘유가 상승’으로 비용이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외부 요인으로 인한 문제가 노사관계에서 조정되지 않고, 일방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이 지속됐다.

또한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집권 여당일 때보다 협상력을 발휘하기 나은 상황인 것도 노란봉투법 입법에 긍정적 요인이다. 집권 여당은 정부 예산안, 예산부수법안 등의 통과를 위해 야당과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야당인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한 상황이다. 여차하면 패스트트랙도 이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의지와 전략을 가지고 접근하면 지금의 상황을 분명 바꿀 수 있다. 어쩌면 민생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이재명 당대표 체제의 민주당은 노란봉투법이란 첫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노동 중심성이 약해졌다는 비판으로 당의 지지 기반이 약해지고 있는 정의당에도 노란봉투법이 중요한 시험대인 것은 마찬가지다.

손배 가압류가 한국만의 독특한 문제인 이유

쟁의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손해배상 가압류는 33년이 된 해묵은 문제이고, 이번이 세 번째로 마련된 ‘공론화의 계기’다. 손해배상 가압류의 역사는 1989년 통일중공업(현 SNT중공업)이 노동조합에 ‘노동쟁의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 청구’에서 비롯됐다. 특히 1990년 10월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던 최병렬 전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가 “노동운동의 준법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대책”으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적극 활용하라”는 지침을 발표했고, 기업들은 이 지침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부터 손해배상 가압류에 대한 국내 논의가 전 세계에서도 독보적이게 독특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정부가 공식적으로 노조를 압박하는 방식을 기업에 코칭하는 사례가 드물 뿐만이 아니라, 손해배상 가압류를 노조와 노동자를 탄압하고 길들이는 수단으로 쓰는 나라도 한국밖에 없다.

보수 언론과 보수 정당은 자꾸 특정 대상에게만 손해배상 청구를 원천 차단하는 입법 사례가 전 세계에서 전무하다며 일견 타당해 보이는 ‘노란봉투법 불가론’을 펼치지만, 문제의 본질은 ‘손해배상 청구’를 한국처럼 악용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복수노조를 허용했더니 그걸 손해배상 가압류 청구와 함께 노조 파괴 수단으로 쓰는 기업이 있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문제에 대한 논의가 꼬이는 이유는 해외에서 입맛에 맞는 사례들만 찾아와 단편적으로 인용하는 행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게다가 현재 발의된 노란봉투법은 손배 청구를 원천 차단하지 않는다. 폭력·파괴 행위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책임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다.

손해배상 가압류 사안의 첫 번째 공론화는 노동자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두산중공업이 구조조정에 반대해 쟁의행위를 한 노조와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월급마저 가압류에 걸린 배달호씨가 2003년 1월 9일 분신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손배 가압류가 처음 의제화가 됐지만, 정치권의 후속 논의는 없었다.

두 번째 공론화는 누적된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한 인상적인 대응이 계기였다.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에 대항한 파업과 강제진압이 있었고, 2010년대에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컨설팅으로 손배 사업장이 급증했다.

세 번째로 맞은 공론화의 계기

그러다 2013년 말 쌍용차 노조가 국가와 회사로부터 47억원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이 뉴스를 보던 세 아이의 엄마 배춘환씨가 자녀의 태권도비로 내려던 4만7000원을 노란봉투에 담아 자신과 같은 사람이 10만명이 모이면 47억원을 갚아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보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노란봉투 모금 캠페인이 시작됐고, 시민단체 ‘손잡고’가 결성됐다. 그 해에 노란봉투법 국회 발의(은수미 전 의원 대표발의)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였다. 이후 손잡고 전 공동대표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문재인 정부의 요직에 있었고, 손배 가압류 문제 해결에 지지를 표하던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 됐어도 진전은 없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 초기 여소야대였던 국회 상황과 최저임금과 주 52시간제 등의 여타 노동 정책들보다 후순위로 밀린 영향이 아닐지 필자는 추측할 뿐이다.

다시 8년이 지났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노란봉투법은 세 번째 공론화의 계기를 맞이했다. 대우조선해양 본사가 분식회계를 하면서까지 보너스 파티를 하는 동안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은 5년간 동결됐다. 이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하청업체 직원이라 교섭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묵살됐다. 하청노동자들이 조선소 도크 점거 농성에 나서자 회사 측은 교섭에 나서기 시작했고, 임금 4.5% 인상에 합의했다. 대우조선은 협상하면서도 언론에 “파업으로 입은 8000억원(회사 쪽이 임의로 산정한 금액)의 손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노조를 압박했다. 월급 200만원 남짓인 20년차 하청 용접공에게 수천억원의 손배 청구를 하겠다는 회사 측의 입장은 그 자체로 손해를 배상받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노조를 괴롭히고 와해하려는 취지’임이 분명히 드러났고, 다시금 이 사안이 공론화된 핵심 계기가 됐다.

핵심은 노사 간 협상력의 균형

손배 가압류를 겪은 노동자들은 그 어떤 노동 탄압의 수단보다 위력적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생계가 어려워지는 것을 넘어 자녀의 앞길을 망친다는 자책, 가족 간의 불화 등으로 이어지고, 동료들 간의 이간과 배신도 잦아지기 때문이다. 2019년 고려대 보건과학과 연구팀이 9개 사업장의 손배 가압류 피해노동자 236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지난 1년간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경험’이 남성 30.9%, 여성 18.8%였다. 이젠 손배 가압류가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대부분의 노동자가 이미 알고 있다. 식품업체 참프레는 2022년 “계속 파업하면 손배 소송을 청구한다”는 말을 흘린 것만으로도 노조를 와해시킬 수 있었다.

일각에선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불법 파업이 만연해진다고 걱정한다. 필자는 이 걱정에 문제 해결의 단초가 있다고 본다. 노동조합도, 노동자 개인도, 회사도 각자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고, 적절한 선에서 서로의 이익이 조정돼야 한다.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법은 이 조정이 한쪽에 지나치게 유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지금은 어떨까. 대우조선해양, 하이트진로 모두 자신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한 ‘사용자’가 아니라며 교섭 자체에 응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쟁의행위의 적법한 주체가 아니었지만, 쟁의에 나서야 회사 측이 교섭을 시작했다. 대신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배 청구로 처절한 응징을 당했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만일 쟁의행위에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단 기업들은 ‘손배’라는 치명적인 무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농성에 이르기 전에 노동자들과 성실하게 교섭할 이유가 생긴다. 물론 여전히 기업엔 ‘직장폐쇄’를 통해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강력한 대응 수단이 있다. 노동자들도 파업에 이르러 소득이 단절되지 않고 교섭을 통해 자신의 근로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대안을 얻을 수 있다. 그리될 수만 있다면 노동자들이 불법적인 ‘독점적 점거’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어진다. 결국 핵심은 노사 간 협상력의 균형 회복이다. 노란봉투법을 시행하고서 노사관계의 양태를 봐가며 보완할 수도 있다. 일각에선 노란봉투법이 ‘귀족 노조’의 이익을 보호하는 악법이라고 폄훼한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손배 가압류의 33년 역사에서 정리해고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청구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업들도 힘이 있는 상대에겐 ‘괴롭히는 수단’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끝으로 노란봉투법 이외에도 손배 가압류 문제를 개선하는 다른 수단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하나는 손배 가압류를 통한 노조 탈퇴 압박을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하는 입법이다. 현재의 규정으로도 이를 부당노동행위로 볼 수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보다 분명하게 이를 법률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수단은 괴롭힘 소송 방지법이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0년 12월 이미 괴롭힘 소송을 각하할 수 있는 ‘괴롭힘 소송 방지 특례법’을 발의해둔 상태다. 야당은 노란봉투법 협상에 여러 수단을 가지고 임할 필요가 있다. 이미 너무 늦었지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젠 정치가 유능함을 보여줄 차례다.

윤형중 정책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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