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목숨 저울질, 우리 이대로 살 순 없잖아요
[주간경향] 노동조합과 투쟁하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손해배상은 노동자의 삶을 파괴하고 인권을 파괴하는 행위다. 실제로 손배·가압류로 인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기업은 ‘재산권’을 이야기한다. 이는 돈과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노동자가 수백 번 죽었다 살아나도 갚지 못하는 금액을 배상하라는 의도는 분명하다.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기본권과 인권을 박탈했을 때, 기업은 노동자들을 더욱 손쉽게 돈벌이 수단으로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거제 대우조선해양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은 ‘돈벌이 수단’이길 거부했다. 위험한 노동현장에서 안전하게 일을 하고, 배를 만드는 숙련 노동자로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자 했다. 대우조선해양이라는 기업에서 ‘수단’이 아닌 구성원이 되길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에 대한 대우조선해양의 답은 470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이었다.
소장을 접수한 날 대우조선해양은 언론을 통해 소송 제기 사실을 알렸다. 소장을 송달받기도 전에 470억원이라는 큰 금액이 청구됐다는 것을 언론사 취재연락을 통해 들었다. 사실 7000억원이든, 8000억원이든, 470억원이든, 200만원대 월급쟁이에게는 벌 수도, 갚을 수도 없는 금액일 뿐이다. 단지 소장을 통해 금액이 어떻게 산정됐는지 확인했을 땐 허망함을 느꼈다. 고정비로 주장한 6만3113원/MH(생산용 시수·대우조선해양은 생산공정에 직접적으로 쓰인 시간당 가공비 단가를 6만3113원으로 계산했다)에다 51일의 파업으로 사라진 작업시간(75만시간)을 곱해 청구액을 산정했다고 한다. 하청노동자들이 그만큼 받았다면 파업을 했겠는가.
기업이 소송을 제기한 이유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대우조선해양은 ‘향후 불법점거와 파업의 재발을 방지하고, 건설적인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470억원이 아니라 8000억원을 청구한다 한들 저임금, 중대재해 사업장에서 건설적인 노사관계 구축은 불가능하다.
파업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온 건 하청노동자들이다. 우리는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파업은 하루아침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차에 따라 합법적인 파업권을 획득하고도 파업을 하지 않기 위해 대우조선해양에 수차례 대화를 요구했다. 대우조선해양은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1년이 넘도록 번번이 대화를 거부하며 단 한 가지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우조선해양도 소장에서 스스로 인정했다.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은 단체교섭 의무가 없다.” 단 한줄로 그간의 행태를 정당화했다.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노조법’을 들이밀었다.
그러면서도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데 있어선 전권을 행사했다. 하청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방해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대우조선해양은 대체인력을 투입했다. 합당한 이유 없이 노동조합 지회장의 회사 출입을 불허했다. 어용구사대 수백명을 동원해 파업 중인 하청노동자들을 폭력으로 해산하려고 시도했다. 구사대 동원이 문제가 되자 회사는 동원된 노동자들이 자의로 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아무 상관 없다는 하청노동자의 파업에 대해서는 적극 대응하면서, 원청 노동자가 업무 시간에 자의적 행동을 하는데, 회사는 지켜만 보고 있었다.
회사의 파업 방해가 공격적으로 흘러감에 따라 하청노동자들은 다치고, 쓰러지고, 불안에 떨다 끝내 철창감옥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뒀다. 이것에 대해서도 대우조선해양은 노조법을 운운하며 “반사회성을 띤 쟁의행위”라고 모욕했다. “이대로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손글씨로 써낸 이 구호에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할 때도 회사는 하청노동자들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회사의 잘못은 감추고 최저임금 받으며 온갖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하는 하청노동자들을 폭력배로 매도했다. 원청과 하청노동자들을 갈라치기해 노노갈등을 유발했다. 보수언론은 이를 받아쓰며 재생산했다.
이처럼 대우조선해양이 노조법을 악용해 노동권을 부정하는 동안 정부는 어떠했나. 갈등을 중재하고 기본권 보호에 적극 나서기는커녕 교섭을 앞둔 시점에 정부가 직접 공권력 투입을 시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불법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면서 국민을 볼모로 내세워 하청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에 ‘불법’을 덧씌웠다. 회사의 ‘불법’은 외면하고 대체 왜 하청노동자가 스스로를 가둬 가면서까지 “이대로 살 수 없다”며 전 국민에게 호소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황건적’에 비유
여당은 어떠한가. 처절히 절규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황건적’에 비유했다. 그럼 비정규직 노동자를 ‘황건적’에 비유한 권성동 전 원내대표는 누구에 비유되는 것이 마땅한지 되묻고 싶다.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아 이 나라를 운영하는 자리에 있는 대통령과 여당 수장이 안전사고가 빈번한 노동환경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하청노동자의 파업을 두고 대놓고 기업의 편을 드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비열하고 비정한 자들이 움직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소멸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 국민 한사람 한사람은 스스로 고군분투해야 한다. 이 절망의 길을 멈추거나 돌려세울 힘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국민 여러분!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이 외침이 비단 하청노동자들만의 외침인가. 이 외침은 고해성사와 같은 절규였다.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우리 현실을 노골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외침은 사람이라면 공감해 달라는 외로움의 표현이다. 철창에 갇힌 자신을 드러낸 하청노동자들은 이번 파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수단’으로 전락한 이 시대의 당신과 나의 모습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길 바랐다. 지금 우리는 노동권을 넘어 이대로 살게 된다면 맞이하게 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손배·가압류로 인해 삶을 포기한 노동자들은 갚을 수 없는 돈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이 각박하고 냉정한 세상에 진저리가 났던 것은 아닐까. 살 가치가 없는 세상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노동자의 헐떡거림은 훗날 모두가 겪어야 할 선몽 같은 것이다.
“국민 여러분! 정말 이대로 사실 겁니까?”, “여기 사람 없습니까?”
이 물음에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볼 용기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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