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아니었다..'신라의 명품 귀고리'는 두 여성의 합장분에서 나왔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라 최고의 명품 귀고리가 출토된 고분은 부부총이 아니었다.’
9월 29~30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국립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자료의 공개와 활용’ 학술대회가 열렸다.
우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한 고적 조사 사업에서 발굴·수집한 관련 자료(1912~1945년)가 603책 26만쪽이나 된다는 발표(양성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가 있었다.
또한 해방 후 이 자료를 인수한 국립중앙박물관이 2013년부터 ‘일제강점기 자료 공개사업’을 본격 시작하면서 10년째 검토하고 연구 조사한 뒤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발표문 가운데 필자의 시선을 유독 잡아 끈 대목이 있었다.
■부부가 아닌가봐
1915년 조사된 ‘경주 보문리 부부총’이 실은 ‘부부 무덤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고분이 발굴 때부터 유명세를 탄 이유가 있다. 바로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 귀고리’(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가 출토된 것이 이목을 끌었다.
발굴 직후 일본 학자들은 이 고분을 ‘부부총’으로 명명했다. 이후 100년 가까이 ‘1500년 전 신라시대 부인과 남편이 함께 묻힌 표형분(표주박 형태로 조성된 고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서야 뒤늦게 ‘근거없음’의 딱지를 붙였다.
2012년 고분의 발굴조사보고서를 뒤늦게 펴낸 국립경주박물관 연구팀이 ‘보문리 고분은 부부총’이 아니며 ‘여성 두 분이 합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수정발표했다. 보고서도 <경주 보문동 합장분>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과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고리를 배출했다는 ‘부부’는 어째서 ‘두 여성’으로 바뀌었을까.
■사적(史蹟)보다 고적(古蹟)
때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한반도 전역에서 이른바 ‘고적조사사업’을 벌인다.
일제는 ‘사적(史蹟·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이라는 용어 대신 굳이 고적(古蹟·옛 문화를 보여 주는 건물이나 터)라는 표현을 썼다.(오영찬 이화여대 교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적’보다, 오래된 자취나 흔적에 방점을 찍는 ‘고적’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참고로 일본 본토에서는 ‘사적’ 용어를 썼다.
그렇게 시작된 ‘고적조사’는 경주의 신라, 평양의 낙랑, 낙동강 유역의 가야 옛 땅에 집중됐다. 그 목적은 불순했다.
한사군(낙랑)의 한반도 북부 지배(기원전 108~기원후 313)와, 이른바 삼한정벌 및 임나일본부 설치(한반도 남부·4세기 중후반~6세기 중엽) 등을 입증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한마디로 기원전 108년~기원후 6세기까지 660여 년 동안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평양과 경상도 고분의 마구잡이 발굴로 한국 역사의 타율성 및 정체성의 증거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금관총 발굴(1921년) 이후 일제의 조사(특히 경주)는 ‘보물 찾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이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발굴 조사 보고서 조차 펴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발굴은 했지만 보고서는 내지 않았다
1915년 조사된 이른바 ‘경주 보문동 부부총’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앞서 밝혔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귀고리가 출토된 고분이 아닌가. 1.5m 간격을 둔 두 고분 중 1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다른 1기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신라의 묘제가 마립간시기(356~514)의 산물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 단계(6세기 전반)로 변화하는 시기의 중요한 고분이라 평가한다.
마침 마립간 시대를 끝내고, 율령을 반포하고 국가체제를 완비한 법흥왕(514~540)이 통치하던 때였다. 대형분인 돌무지덧물무덤의 조성이 끝나고, 고분 자체가 시내(대릉원 일대)에서 산지로 이동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중요한 고분인데도 조선총독부는 정식 발굴 보고서를 펴내지 않았다.
1916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3권에 발굴사진과 약도면 및 간단한 설명만 실었을 뿐이다.
이 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인계된 한 장의 유물설명서와, 당시 발굴 실무자의 간단한 논평이 남아 있다. 또 조사책임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가 남긴 야장(발굴 일지)이 일본 도쿄대(東京大)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금귀고리 등 출토 유물들은 해방 후 조선총독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동 이관되었다.
■표주박 무덤이라고 ‘부부총’이라 명명
그렇게 소략한 기록과 남은 유물들을 토대로 발굴의 맥락을 복기할 수밖에 없다. 우선 어떻게 부부총이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조선고적도보>의 간단한 설명을 보자.
“표형(표주박 형태)의 봉분에 2개의 묘가 있다. 하나(갑)는…(돌무지덧널무덤 설명)…하나(을)는…(굴식돌방무덤 설명)…이다. 이 고분은 부장품으로 볼 때 부부의 무덤으로 생각되어 부부총이라 명명한다…갑에서 순금제 굵은고리 귀고리, 은제칼, 큰칼(대도), 작은 칼(소도)…을에서 순금제 굵은고리 귀고리, 은 및 동팔찌 등….”(<조선고적도보>)
<조선고적도보>는 특히 “갑(남편묘)에서 출토된 ‘큰 칼’(대도)은 기이하고, 을(부인묘)에서 나온 귀고리는 아름답고 진기하다”고 극찬했다. 발굴 실무자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1880~1950)는 그해(1915년) 11월23일 도쿄대(東京大) 회의실에서 열린 월례회에서 조사결과를 간략하게 보고했다.
“1개의 봉토 중에 2개의 무덤이 있어 부부의 무덤이라 생각되어 ‘부부총’이라 한다…부인묘는…나중에 합장…남편 무덤의…머리 위쪽에 많은 토기가 있고, 그 토기의 위쪽에서 큰칼(대도)이…부인묘에서는 순금제 귀고리, 수정, 마노옥, 팔찌 등이….”
도쿄대 박물관에 소장된 세키노 다다시(발굴책임자)의 조사일지에 간략한 출토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일지에는 7월6일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을 일자별로 그림과 함께 간략하게 정리해놓았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즉 부인묘로 추정한 굴식돌방무덤의 시신대 위 등에서 오른쪽 팔뚝뼈와 엉덩이뼈, 머리뼈 등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인계된 유물에는 인골이 없다. 지금이라면 성별이나 신원 파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을 인골이지만 당시에는 터부시되어 유물로 취급되지 못하고 버림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된 유물 중에는 이른바 돌무지 덧널무덤(소위 남편묘)에서 출토된 금동관 부품이 여러 점 보인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발굴자들의 기록과 도면상에는 금동관 조각들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발굴자들이 금동관처럼 중요한 유물을 빠뜨렸음에 틀림없다.
■고분 주인공의 성별은 어떻게 판단할까
일제가 남긴 이 단편적인 기록과 도면 등을 보면 또 한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이 고분을 부부묘라고 단정한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조선고적도보>와 야쓰이 등의 보고는 ‘표주박 형태로 두 무덤이 인접해 있거나 혹은 1개의 봉분 중에 두 개의 무덤이 있다’고 해석 만으로 ‘부부묘’로 단정하고 있다.
해방 이후에도 ‘보문리 고분=부부총’이란 등식은 국내학계에서 흔들림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무덤 형태만 고려한 해석은 아니었다. 당시 발굴자들은 먼저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세잎무늬 고리자루큰칼(삼엽문 환두대도)’이, 나중에 만든 굴식돌방무덤에서는 아름다운 ‘순금제귀고리’가 각각 출토되었다는 것에 별다른 고민없이 남편묘(큰칼)와 부인묘(귀고리)로 판단해버린 것이다. 이런 판단은 해방 후에도 별다른 비판 없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축적된 발굴성과에서 점차 다른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어떤 고분에서 ‘고리가 굵은 귀고리나 드리개(태환이식이나 태환수식)’, 혹은 ‘은장도’, 혹은 가락바퀴(실 감는 도구) 등이 발견되면 여성묘로 판단하게 됐다.
반면 ‘가는고리귀고리나 드리개(세환이식나 세환수식)’, 혹은 ‘장식 달린 큰 칼(장식대도)’이나 ‘고리자루 큰칼(환두대도)’ 등이 보이는 고분의 주인공은 ‘남성’이라고 여겼다.
■큰 칼과 귀고리가 시금석
그런데 대표적인 표주박 모양의 고분인 황남대총 남·북분의 발굴(1973~75)에서 흥미로운 양상이 포착됐다.
북분에서 ‘부인대(夫人帶)’ 명문이 새겨진 허리띠 끝장식이 출토됐다. 또 북분의 주인공이 묻힌 덧널 안에서 여성의 상징이라는 ‘굵은고리 귀고리’과 ‘가락바퀴’도 보였다. 더욱이 피장자는 ‘큰 칼’을 차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고분의 주인공은 여성으로 특정됐다. 그런데 해석에 마지막 걸림돌이 있었다. 북분 피장자의 머리 위에 놓인 껴묻거리(시신 매장 때 함께 묻는 물건) 상자 속에서 남성의 상징으로 알려졌던 ‘고리자루 큰칼(금 장식)’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주인공이 여성임이 분명한 무덤의 이 껴묻거리 상자에서 왜 남성의 것으로 알려진 ‘큰 칼’이 나왔을까.
남분은 어땠을까. 60대 남성의 것으로 분석된 인골이 나왔다.
주인공 곁에서 ‘금 장식 고리자루 큰 칼’과 ‘가는 고리 드리개(금관 등의 좌우에 늘어뜨린 장식)’가 출토됐다. 남분의 주인공은 남성의 상징이라는 ‘큰칼’과 ‘가는고리 드리개’를 동시에 착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김없이 걸림돌이 있었다. 여성의 상징이라는 ‘굵은고리 귀고리’가 껴묻거리 상자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여성 무덤이라는 ‘북분’의 껴묻거리 상자에서는 왜 남성의 상징이라는 ‘큰 칼’이, 남성 무덤이 분명한 ‘남분’에서는 왜 여성의 상징이라는 ‘굵은 고리 드리개’가 각각 보였을까.
여기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다. ‘무덤주인공의 실제 착장 여부’가 성별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성 무덤인 북분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이 주인공 주변이 아니라 껴묻거리 상자 속에서 나왔다는 것에 주목했다. 북분의 주인공(여성)은 고리자루 큰 칼을 실제로 차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장례용 물품으로 껴묻거리 상자에 묻어주었을뿐 무덤 주인공의 성별을 가리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해석에 따라 보문리 고분도 ‘부부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가 학계 일각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부부총이 아니라 두 여성의 합장분”
급기야 2012년 국립경주박물관이 발굴 97년 만에 ‘보문리 부부총’의 재해석에 나서 명칭을 ‘합장분’으로 바꾼 발굴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왜 바꿨을까. 남편과 부인의 묘에서 모두 여성의 상징이라는 ‘굵은 고리 귀고리’가 출토되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박물관측은 두 주인공 모두 이 굵은 고리 귀고리를 실제 착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반면 남편묘로 알려진 무덤에서 발견된 ‘세잎 문양 둥근고리 큰칼’은 피장자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토기 위에서 나왔다는 것에 착안했다. 주인공이 실제로 큰 칼을 차고 있지 않았다는 방증자료라는 것이다. 실제 착용여부가 중요하다면 이 ‘큰칼’은 성별판단의 기준에서 뻬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당시 발굴보고서를 펴낸 윤상덕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은 “여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굵은 고리 귀고리’가 두 무덤에서 출토된 상황만을 고려한다면 두 무덤의 주인공은 둘 다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물론 일제강점기 발굴 기록 자체가 워낙 간략하고 엉성해서 100%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학계 일각에서 이 두 고분이 합장분인지도 모호하다는 견해도 있다. ‘굵은 고리 귀고리’가 반드시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유물 하나 하나로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고 무 자르듯이 판단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있다. 일본학자들이 별다른 근거없이 붙인 ‘부부총’ 명칭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문화재청의 지정 문화유산 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본 ‘국보 귀고리’의 명칭은 여전히 ‘경주 부부총 금귀고리’라 되어 있다. 아마 정식으로 국보 명칭을 바꾸는 절차를 거치지 않아서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국립경주박물관이 무려 10년 전에 정식보고서를 내면서 바꾼 명칭이 아닌가. 적어도 보문리 고분의 성격을 드라마틱하게 규정하는 ‘부부총’ 명칭 만큼은 바꿀 필요가 있겠다.
■한석봉 어머니의 떡썰기로 제작된 0.3㎜의 초정밀 예술품
또하나 어떤 경우에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바로 굴식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제귀고리’이다.
이 ‘국보 명품 귀고리’의 좌우 길이는 8.6~8.75㎝ 정도이다. ‘굵은 고리 귀고리’라 무거울 것 같다.
그러나 귀고리의 가운데를 빈 공간으로 하여 무게를 줄였다. 57.1~58.7g 정도 된다.
귀고리의 몸체(커다랗고 둥근 고리)에 타원형의 중간고리를 연결했다. 둥근 고리에는 거북등 무늬와 같은 육각형으로 나누어 그 안에 4엽 혹은 3엽의 꽃을 표현했다. 꽃 하나하나에 미세한 금실(0.6~0.8㎜)과 금 알갱이(0.7~1.2㎜)를 붙여 섬세하게 장식했다. 어떻게 이렇게 미세한 금알갱이를 붙였을까.
이 대목에서 신라 장인은 ‘한석봉(1545~1605) 어머니의 떡썰기 내공’을 자랑했다. 금판을 1㎜도 안되게 떡썰듯 정교하고 일정하게 잘라서 열을 가하면 동글동글한 금알갱이로 구현된다.(이한상 대전대 교수) 표면장력의 현상에 따라….
그뿐인가. 밑부분에는 37개의 나뭇잎 모양 무늬의 장식들을 금실을 꼬아서 연결했다. 장식 끝에 커다란 하트 모양의 드리개를 달았다. 드리개 장식의 두께는 0.3㎜에 불과했다.
이 국보 명품 귀고리의 금 순도는 순금(24K·99.99%)에 가까운 92.32~97.76%(22.2~23.5K) 정도였다.
반면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확인된 ‘굵은고리 귀고리’의 금 함유량은 70.9~85.1%(17~20.4K)선이었다. 왜 돌무지덧널무덤 귀고리의 금함유량이 굴식덧널무덤의 국보 귀고리보다 낮은 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국립경주박물관의 판단처럼 두 무덤이 합장분이고, 그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라면 어떨까. 모녀 혹은 자매 관계일까. 혹은 모종의 특수한 관계일까.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사이일까. 일본 학자들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100년 가까이 ‘부부’로 오해된 두 분의 신라인은 과연 누구일까.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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