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축구장 난동

김태훈 논설위원 2022. 10. 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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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월드컵 지역 예선전은 전쟁으로 비화했다. 1차전이 온두라스에서 열리자 홈팀 응원단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소에 몰려가 밤샘 소란으로 수면을 방해했다. 경기에서 패한 엘살바도르는 자국에서 열린 2차전 때 온두라스 선수단 음식에 설사약과 수면제를 넣어 보복했다. 2차전에 이어 최종전까지 엘살바도르가 승리하자 온두라스는 자국 내 엘살바도르인을 추방했다. 분노한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로 쳐들어가며 전쟁이 시작됐다. 닷새 만에 휴전했지만 종전까지는 10년 걸렸다.

▶사람 잡는 흉기가 난무하는 대표적 경기도 축구다.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 지도자였던 라즈나토비치는 축구 구단주이기도 했다. 자기 팀 서포터를 시켜 라이벌 팀 선수를 납치·감금하고 상대팀 응원단을 총살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수비수는 귀국 후 총탄 12발을 맞고 절명했다. 한국 축구팀도 몇 해 전 중동에서 올림픽 예선전을 치를 때 경기장에 날아든 폭죽에 선수가 다치는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지난 주말 열린 축구 경기에서 수백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빚어졌다. 1964년 아르헨티나-페루전에서 328명이 숨진 이후 최악의 인명 피해다. 대규모 인명 사고는 대개 난동 자체보다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번 참사는 물론이고 몇 해 전 100여 명이 사망한 가나 참사도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출구로 한꺼번에 몰린 관중이 넘어지며 발생했다. 축구장 난동을 예방하지 못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엄벌이 대세이지만 효과는 한계가 있다. 스위스는 폭죽을 터뜨린 관중에게 3년 징역에 10년간 경기장 출입까지 금지했다. 이탈리아는 경기장에 난입만 해도 징역 6개월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흥분이 극에 달한 관중은 처벌받을 것을 알아도 제어가 안 된다.

▶“악당은 나쁜 짓 하고 선인은 착하게 군다”는 견해를 성향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에선 개인의 성향보다 주변 상황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군중 속에 있으면 선량한 이도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축구장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모든 곳이 해당한다. 남자들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운동 경기 특성상 자신과 응원팀을 동일시하는 정체성 융화가 더해지면 인간은 난폭해진다. 사고 치지 않으려면 흥분을 가라앉힐 수단을 준비해야 한다. 영국은 “가족과 함께하는 축구장”이란 표어를 만든 후 그나마 훌리건 난동이 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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