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48] 자기를 비우는 과정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입력 2022. 10. 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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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묘법(描法) No.180118, 2018년, 캔버스에 한지와 혼합 매체, 130×200㎝. /기지재단 제공

박서보(朴栖甫·1931~)의 ‘색채 묘법’ 중 단풍을 닮은 작품이다. 가까이 서면 눈 속에 온통 빨강이 들어오지만 그 색이 찌르듯 사납지 않고, 발걸음을 옮기는 대로 울긋불긋 변화해서 꼭 가을 산을 마주한 기분이다. 1950년대 중반, 보수적인 국전(國展)에 반기를 들고 추상화를 선보였던 박서보는 1970년대 초부터 유백색 위에 연필을 반복적으로 움직여 맥박처럼 진동하는 필선(筆線)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묘법’ 연작을 시작했다. 그는 이토록 단순한 행위를 자기를 비우기 위한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고 수십 년 동안 지속했다.

박서보가 화폭에 색채를 담기 시작한 건 2000년 어느 가을, 그의 ‘묘법’이 이미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걸작으로 우뚝 섰을 때였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붉은 추색(秋色)이 불길처럼 타올라 그에게 다가오는 기세에 놀라면서 박서보는 새삼스레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단풍색, 홍시색, 황금 올리브색으로 물들었다.

흔히 단풍을 두고 나뭇잎이 빨갛게 물든다고 하지만 사실은 초록물이 빠진 것이다. 낮이 짧고 기온이 낮아지면 나무는 광합성을 멈추고 쉴 채비를 하는데, 그때 잎에서 엽록소가 빠져나가 원래의 빨갛고 노란 색이 드러난다. 그러니 박서보의 ‘색채 묘법’도 색을 더한 게 아니라, 엄격한 수행으로 자아(自我)가 빠져나간 자리에 비로소 자연의 온갖 색이 나타났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아흔을 넘긴 화가는 지금도 색을 입혀 적신 한지를 캔버스에 겹겹이 얹고 수없이 긁어서 말린 뒤 다듬어 작품을 완성한다. 그에게 영원히 겨울은 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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